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금쟁이 Oct 22. 2023

칼박똥필, 똥박충필

- 피아노 1편 

     한때 나의 전부였던 서태지는 누구나 잘 알 듯 시나위 출신의 베이시스트다. 

전설의 밴드 시나위에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신대철은 서태지를 두고 칼박똥필이라고 했다고 한다. 박자는 칼인데 필(feel)이 똥이라는 소리란다. 참…. 서태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락 키즈였던 나는 왠지 모르게 클래식 음악도 너무나 좋았다. 베토벤의 월광. 쇼팽의 녹턴. 리스트. 모차르트. 슈베르트…. 흔히 클래식 음악이 우아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 생각하겠지만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음계에 전율을 느끼며, 뭐랄까 머리를 흔들고 싶게 하는 하드락과 묘하게 닮아 있다 생각했다.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에 사교육 받는 친구가 가장 부러웠던 나는 그중에도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을 유독 시기하고 질투했다. 80년대에는 ’ 우리 집에 피아노 있어’라는 것이 곧 부의 상징이었고, 클래식을 안다는 것이 곧 지식인임을 인증받는 것과 같은 시절이었다. 내가 정말 클래식을 좋아했는지 그때가 치기 어린 내 허세의 시작이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할 일은 없고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는 ’아주 쪼큼한’ 일본인 무역회사에 입사하여 내 손으로 밥벌이를 시작하게 된 나는, 곧 사교육 성애자가 되었다. 일찍이,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교수의 심야 문화 초대석 강연 덕분이었다. 주제는 시작한다는 것의 의미였고 시작하는 것은 새롭게 무언가를 밖에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시작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유레카! 


       예의상 일본인 사장의 말귀 정도는 알아들어야 된다는 생각에 아침에는 일본어 학원을 끊고, 퇴근 후에는 동네 어귀의 허름한 피아노 학원에 들렸다. 혹시 퇴짜라도 당할까 봐, 수줍은 표정에 꼭 배우고 싶다는 결기를 담아, 내 나이에도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겠냐 물었고, 나보다 더 수줍은 표정의 선생님은 꾸준히 할 수 있겠냐 되물으셨다. 성인들이 배우러 와서 두세 달 다니다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하여 성인 피아노 레슨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꾸준히 할 자신이 있다는 또 수줍은 거짓말을 하고, 다음날 악보 읽기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바이엘을 시작으로 옆 방에서 초딩, 중딩들이 멋들어진 곡을 칠 때 나는 떴다 떴다 비행기를 쳐야 하는 신세가 - 그것도 느릿느릿 건반을 눌러대던 신세가- 꽤 오랫동안 지속됐던 것 같다. 


          그때 크게 깨달은 것 하나는 나는 정말 박자 감각은 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느낌만은 그 누구보다 충만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유달리 박자 감각이 없는 게 아니고, 대부분의 성인들이 박자 감각은 없으나 아이들보다 악보는 잘 읽는다며 또 수줍게 나를 위로하셨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 내 손가락 하나하나가 건반에 닿아 연주 같은 걸 치기 시작할 때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것이 비록 어린이 동요 100선에 있는 곡이라 할지라도 양손으로 다른 음을 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마냥 신기하고 내 인생 최대의 성취감을 느꼈다. 


       이분음표, 사분음표, 팔분음표. 십육분음표. 거기다 점을 붙이고 꼬리를 하나 붙이고 두 개 붙이면 점 십육 분 음표.  나는 한결 같이 박자 개념이 없다. 그리고 또 한결 같이 계이름 네 칸을 넘어가면 밑에서부터 읽어야 이게 파인 지 솔인지, 겨우 구분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굴의 노력으로 바이엘을 끝내고 체르니 30으로 넘어갈 무렵 선생님은 학원에서 주최하는 연주회에 아이들 반주라도 해보라며, 무대 경험을 제안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마땅히 거절했어야 할 그 무대에 나는 정말 호기롭게 나가겠다며, 기회를 주셔 감사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인형 같이 이쁘게 생긴 6살 유아부터 10세까지 부르는 합창에 반주를 맡은 나는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연습만이 살 길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대에 오르자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이 되었고, 프란츠 리스트로 빙이 했다. 모든 박자를 무시하고 미친 듯이 그들의 곡을 치듯 속주하기 시작했다. 연주가 시작된 무대에서 나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착한 어린이들은 6년 인생 최대의 당황스러움을 느꼈겠지만, 누구 하나 울지 않고 꿋꿋하게 그리고 잽싸게 노래를 따라 불러주었다. 17년이 지난 지금,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한결같이 부끄러움이 없던 나는 한차례 폭풍 같은 무대 경험 이후, 혼자 치는 피아노는 재미가 없다며 무려 제1회 김아무개 피아노 리사이틀도 개최했다. 클래식의 본고장 독일의 어느 바에서 술 취한 듯 테이블에 엎드려 찍은 사진이 나름 섹시한 거 같다며 사진 포스터를 만들어 A4용지 30장을 프린트해서 온 학원 벽면에 도배를 했다. 친구를 부르고 친구의 동생을 부르고 언니를 부르고 언니 남지친구까지 불렀댔다. 그때 내가 칠 수 있는 곡은 고작 3-4곡에 불과했지만 상냥하게도 그들은 꽃다발 사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삑사리의 향연이었던 그날의 제1회 김아무개 피아노 리사이틀은 제1회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박자는 똥이고 필은 충만한 똥박충필의 똘아이임이 틀림없다. 


시작한다는 것의 참의미를 깨달은 똥박충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