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금쟁이 Oct 22. 2023

손가락은 기억한다

- 피아노 3편 

    다시 피아노를 시작한 건 영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하고였다. 무려 5, 6년 만에 다시 앉은 피아노 앞에서 너무나 신기하게도 손가락은 기억하고 있었다.  25살에 피아노를 시작할 때 보다 경제사정이 나이진 나로서는 무려 원장님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레슨을 받은 날은 피아노 소리가 한결 아름다워졌다. 


        이제는 체르니 30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곡을 들고 가면 그 곡만 레슨을 봐주시는 걸로 한결 업그레이드되었다. 돈이 더 많이 필요했던 나는 제주도로 이직하여, 다시 동네 피아노를 찾아 원장님 레슨을 계속 이어가고 있고 재능 없는 나의 피아노 연주도 계속되고 있다. 회사에서 내 직급이 올라갈수록 나는 더 마른 몸을 갖게 되었고 약속된 레슨에 가지 못하는 날들도 더 많아졌다. 짧으면 2주 바쁘면 한 달 어떨 때는 한 달 반을 넘기기도 한다. 피아노 레슨이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고단한 회사 생활에 정말 오랜만에 찾은 피아노 학원. 악보를 읽을 수 있기는 할까? 어디까지 배웠지? 과제가 있었나? 도대체 언제가 마지막 레슨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피아노 앞에 앉아, 박자는 여전히 똥이지만 Feel 은 충만하게 내 온 마음을 다해 건반에 손을 얹으면, 손가락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듯 건반을 두드린다. 


        연주자들은 어떻게 전체 곡을 기억할까 항상 의문스러웠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은 몇 년이 지나도 내 뼈마디 하나하나에 담기는 걸까? 과학적으로는 절차기억이라고 한단다. 반복된 신체 동작이 뇌를 계속해서 자극하게 되면 장기기억으로 남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게 되는 원리. 그래서 5년이 지나도 몇 주가 지나도 내 장기기억으로 남아 언제든 건반 위에서 제 음을 찾아 곡을 연주하게 된단다. 음악이 왜 다른 기억들과는 달리 뇌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지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하는데 과학적인 설명을 굳이 하지 않아도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레슨을 꾸준히 나가지 못해도 내 손가락이 음계를 기억하는 이유는 지난 시간 나의 레슨을 담당해 주셨던 세 피아노 선생님들의 응원이 아니었나 싶다는…


         그들은 언제든지 내가 학원에 가서 자유롭게 연습할 수 있도록 학원의 키를 기꺼이 내어 주셨고, 레슨비는 꼭 4번을 다 채워야 다음 레슨비를 받으셨다. 그들의 밥벌이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나를, 연습량도 많지 않아 진도도 더디게 나갔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나가던....


 나에 대한 그들의 응원을 내 손가락이 기억한다. 

이전 02화 마의 구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