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나의 시간을 뜨겁게 달구며 흐르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집 뒤편 텃밭이 밀림으로 변한 걸 알아차렸다.
며칠 새 풀들의 키가 훌쩍 자란 난 모양이다.
작년의 기억을 가만히 더듬어 보니 올해 유난히 풀들의 기세가 드세진 것 같다.
이 계절이 뿜어내는 뜨거운 생명의 에너지가 오롯이 풀들에게만 주어지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텃밭에 올망졸망 자리하고 있는 나의 연약한 농작물들 사이를 사정없이 빽빽하게 비집고 들어서서 그곳에 작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옥수수는 큰 키 덕분에 텃밭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시원스레 드러내고 있었다.
옥수수가 있었어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집 뒤편 공터가 주인 없이 버려진 풀밭이 아니라 작물이 자라는,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충분하지는 않지만 가끔씩은 관리되고 있는 어였한 텃밭이라는 암시를 외부세계로 손쉽게 드러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뭉게구름에 닿을 듯 키가 자란 풀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너희들도 여한 없이 마음껏 한 번 자라 봐라. 속이 뻥 뚫리게 시원시원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봐라. 여름 이잖아. 너희들의 계절이기도 하잖아’
물론 나의 게으름을 덮을 수 있을까 해서 쥐어짜 낸 생각이었겠지.
그날 저녁, 잠자리에 누웠을 때 불현듯 텃밭 밀림 속을 뱀이 기어가는 상상을 하게 되었을까?
그때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면서 나에게 다그쳤다.
‘그깟 풀 좀 베는기 뭐가 그렇게 힘드노? 더워도 그냥 좀 참고하면 되잖아’
때가 되었다. 제정신인 이상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다음 날 아침, 풀밭에 서서 예초기의 스위치를 켜자 회전하는 칼날의 기계음과 함께 기세 등등했던 풀잎들이 맥없이 가로로 드러눕기 시작하면서 그늘 한 뼘 없는 두둑에서 작열하는 태양빛을 모질게 받아온 고추들이 빨갛고 굵게 익어가는 모습으로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풀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진한 초록색에서 생생한 붉은색으로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었다.
40분쯤 지나자 예초기의 칼날이 갑자기 회전을 뚝 멈추었다. 배터리가 다 소진된 모양이다.
땀이 샘물 솟듯이 뿜어져 나왔다. 피부를 콕콕 찌르는 햇빛이 작업복을 뚫고 온몸에 찰싹 들러붙어서 떠날 줄을 몰랐다.
파란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니 현기증이 살짝 일었다.
배터리가 더 빨리 소진되었으면 좋았을 걸.
모처럼 단시간에 땀을 많이 흘린 덕에 그날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수시로 물을 먹어주어야만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만간 땅콩과 고구마 이랑의 풀들도 상대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피할 수는 없겠지.
여름날 한낮의 열기가 저녁노을을 찬연하게 하는데 큰 몫을 하는 게 분명한 듯하다.
낮동안 구름을 푹~ 쪄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생 구름에 천연 염색하듯이 그토록 아름다운 색깔을 입힐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계절 중 여름의 저녁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이유는 한낮의 뜨거운 열기 덕분이라고.
저녁노을에 홀려 텃밭 앞으로 뛰쳐나간 날 그곳에 손님이 한 분오셨다.
‘루루’다.
아래 동네 제준이네에 사는 어린 고양이이다.
산책 나왔다가 배가 고픈지 먹을 걸 달라고 ‘야옹~’ 거렸다.
아내가 집으로 재빨리 달려가서 우리 집 고정 식객 고양이인 ‘풍요’ 사료를 들고 나와 급한 김에 길 위에 사료를 조금 떨어트려 놓았다.
‘루루’가 사료를 먹는 동안 저녁노을이 그 녀석의 새까만 등을 은은히 비추어 주었다.
‘루루’가 괜히 멋있고 친근해 보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루루’는 요즘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사료를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야옹!’
녀석은 온몸이 깜장 털에다가 두 눈이 샛노란 색이다.
어제는 시립도서관 어린이 자료실에서 책 한 권을 빌렸다.
이수지 작가의 <여름이 온다>이다.
첫 페이지는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무대를 향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걸어가는 단원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시작부터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단원들이 걸어가는 모습 자체가 음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웅장하면서 감미로운 음악을 들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한쪽 눈을 최대한 가늘게 떠고 휴대폰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를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빗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았다.
처음에는 시끄러운 빗소리였던 것이 고요 속에서 피어나는 부드러운 소리로 변했다가 한 순간 수 천마리의 말들이 대지를 한꺼번에 내달리는 웅장한 굉음이었다가 서서히 모든 소리가 사라진 빈 허공만 남았다가 다시 가만히 무언가 속삭이는 소리가 귓전에 부드럽게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리곤 나를 깨우는 소리에 또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늦잠을 잤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쾌했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 나들이에서 돌아오면서 한적한 시골 도로변에 파스텔톤으로 피어있는 배롱나무꽃을 차 안에서 찍어보았다.
내친김에 집 마당과 텃밭에서 여름을 살고 있는 나의 친구들을 사진으로 담아서 모아 보았다.
여름을 살아가면서 같이 살아가는 것들에 새로이 눈을 떠보고 싶어졌다.
성가신 이름 모를 풀들과 황홀한 저녁노을, 고양이 ‘루루’, 여름 새벽에 내리는 비, 꽃과 과일들.
여름이 여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선물들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