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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와케이크 May 05. 2022

대학교 4학년의 참회

4년간 캠퍼스 라이프를 돌이켜보며

 전역 후, 갑작스럽게 맞이한 코로나 사태는 수 차례에 걸친 절정을 맞이한 후, 이제서야 해소의 단계에 들어선 듯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결말의 끝자락을 붙잡고 끝날듯 끝나지 않는 긴장감을 끈덕지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상보다 길어진 코로나 사태 가운데서, 저는 마스크속의 맨입에 어쩌다 바깥공기가 스치는 것만 느껴도 대단한 일탈이라도 한 것처럼 느끼게 되었고, 지속된 칩거 생활로 인해 생긴 불면 증세들은 여명과 황혼의 교차속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저의 생활 패턴을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이러한 생활양식의 변화는 저의 20대 초반을 정적이고 반복스럽게 만들었고, 저는 그 고요하고 잔잔한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어느샌가 대학교 4학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넓은 시각으로 보면 대학생이라는 어감에 맞지않게 참으로 단조롭고 굴곡없는 3년을 보낸 것 같다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저 답지 않게 다사다난한 3년을 보냈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학교 4학년이라는 것은 저같이 변화에 둔감하고 무던한 사람에게도 특별한 감상을 남기는 것이라서, 저는 이 시점에서 제 대학생활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제게 대학교 1학년은 그저 끔찍하기 짝이없던 고등학교 3학년의 기억을 덮어쓰기 위한 일종의 도피처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탁트인 대학교 전경, 난생 처음 보는 동기들, 수험생이 아닌 새내기라는 호칭들은 언제나 제게 설렘보단 안도감을 안겨주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새내기 답지않게 조금 지나칠정도로 방어적인 대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MT나 축제같은 다양한 행사들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려는 시도도, 노력도 하지 않은채 그저 적당히 학점을 쌓고, 기다리면 당연히 찾아오는 주말과 연휴만을 즐겼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자 과대와 동기는 1학년 내내 제게 존댓말을 했고, 저는 학교에서 입을 여는 일이 점차 줄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낄 여지도 없이, 저희 집 우편함에 입영통지서까지 날아들어옴으로써, 그런 저의 대학생활조차 잠시 끊기게 되었습니다.


 1년 8개월 뒤, 집으로 돌아온 저는, 개강시기에 본격적인 코로나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TV너머로 들려오는 사태의 심각성은 전면 비대면 수업과, 외출 통제등을 통해 확실히 제 삶에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비대면 수업의 편리함을 누렸던 것도 잠시, 기약 없는 코로나 사태의 연장으로 지쳐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칩거 생활의 지속으로 인한 고립감에 시달리며 마스크속 입가에 상쾌한 바깥 공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갇혀있으면서 할게 공부밖에 없었다보니, 성적은 괜찮게 나왔음에도 이상하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얼굴만 알고 있던 동기들조차 이젠 보이지 않고, 2년만에 학생이라는 이름을 다시 붙잡은 길잃은 복학생의 미래 앞에는 2년전 고독한 학교생활의 연속만이 기다리고 있었을터이지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오히려 이런 상황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잠시 안정되었던 20년 5월, 딱 하나 있었던 조별 과제에서 저는 3년전 처음 학교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동기 2두명과 같은 조를 꾸리게 되었습니다. 전역 후, 새내기때 보았던 학생들을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저로썬 이러한 우연이, 추억속 장면을 다시금 목격하게 한 것 같은 감격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두명은 제게 과분할 정도로 괜찮은 사람들이어서, 저는 이 두사람의 협조에 힙입어 무사히 조별과제를 마쳤고, 조별과제가 끝난 이후로도 친분을 유지하면서, 저는 대학생활 3년만에 첫 친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두사람은 언제나 저를 '--씨'라고 불렀고 저는 이 두사람을 '아저씨'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1학년 때의 제 대학생활을 생각하면 가히 뜻밖의 수확이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이번엔 같은 조별과제 수업을 들었던 여학생 두 명이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조별과제때 같은 조로 넣었어야 했는데' 같은 몹시 립서비스스러운 말까지 하면서 말이죠. 동기였지만 2살 동생이었던 이 친구들은 특강때 부쩍 가까워지게 되어 2학년 2학기 수업까지 같이 듣게 되었고, 저는 뜻하지 않게 부쩍 늘어난 학교 친구들을 보며, 인생사 새옹지마란 말의 의미를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1년, 3학년을 맞이하면서 이제는 분명히 고학년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학년이 되었지만, 저는 뒤늦은 사춘기라도 맞이한 것처럼 수업시간 때때로 공상에 빠져들고, 나른한 기운에 심취하며, 아침 9시 수업을 대책없이 자체휴강하는 등, 몹시 게으른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 게으름엔 특별한 이유가 없고, 있다한들 전부 변명이겠지만 제가 기억하는 불과 몇달전의 저는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방학기간동안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학교 기업에 현장 실습을 신청했던 저는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 보다 실전적인 지식을 익혀갈 것을 기대했으나 학교 기업은 실습 공고에 적혀있던 것과는 다르게 실습 첫날부터 생산 라인에서 현장 노가다를 시키더니 방학 끝날까지 포장 및 생산 근무만을 시켰습니다. 결국 실습기간 내내 공장일에 버금가는 근무를 했던 저는, 통수를 쎄게 맞은 듯한 얼얼함은 둘째치고 강도높은 근무에 몸이 지쳤었습니다. 아버지가 예전부터 공장을 운영하시고 계셔서, 중학교때부터 아버지의 공장근무를 도와왔음에도 그런 저에게도 방학기간동안 해온 근무들은 꽤나 빡센것이었습니다.


 방학이 끝나자마자 쉴틈도 없이 바로 개강을 맞이한 저는 몸의 피로 때문인지 아침 9시 수업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것이 미친듯이 괴로웠고 나와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비좁은 시내버스에서 부대끼는 것이 미친듯이 답답했습니다. 간밤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은 몸을 이끌고 시내버스에서 휘감겨온 사람들의 열기와 멀미를 안은 채, 도대체 왜이리 높은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학교 오르막을 겨우 올라 최악의 컨디션으로 수업을 들으니 저는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지쳐있었고, 의욕은 줄어만 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는 환기를 원하는 제게 바깥공기의 상쾌함 마저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사람들도 지쳐있었는지 저는 엄청 가까웠던 몇명과도 트러블을 겪으며 조금씩 궁지에 몰려갔습니다. 뾰족한 수가 없었던 저는 모든 연락을 다 끊고 잠적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시간이 모든걸 치유해줄거라 믿으며, 그저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주말과 연휴를 반복하며, 방학을 맞이하고 저는 조금씩 회복되어갔습니다.

그렇게 4학년을 맞이했습니다.

 

 대학교 생활은 대체로 자유로웠습니다. 초 중 고 12년의 통제되고 억눌려온 시간들을 보답받기라도 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자유로웠던 만큼 저의 양심과 책임감을 시험하는 듯 했습니다. 내일 아침 수업을 나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 이번 학기 학점을 널널하게 들어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 시험기간 공부시간을 내 마음대로 안배하는 것도 내 자유였지만 빠진 출석만큼 떨어진 내 점수를 시험으로 메꿔야 하는 것, 학기에 못 채운 학점을 방학을 반납해가며 채워야 한다는 것들은 모두 제가 누린 자유에 대한 책임이었습니다. 주어진 시간 내에서 얼마 만큼의 자유를 누리는지는 상관없지만, 반드시 누린 만큼의 책임은 모두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 이것이 여전히 학생이지만, 동시에 성인이 된 제게 주어진 어른으로써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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