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살아야 할 이유
우울증 진단을 받은 후로 모든 것에 물음표를 붙이는 버릇이 생겼다.
요즘 내가 꽂힌 단어는 '내일'이다.
'내일을 향해 달리자', '어제보다 나은 내일' 등 내일을 잘 살자는 말에 물음표가 붙었다.
거지 같았던 오늘에서 고작 24시간을 더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드라마틱하게 나아지기에는 우울증의 기세가 너무 세고, 내 의지는 약하다. 고작 24시간이 나 따위를 얼마만큼 바꿔놓을 수 있냐는 말이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후로 내일을 기대하지 말자고 스스로와 약속을 한 것만 같았다.
구질구질한 이 시기를 견디면 어떤 보상이 주어질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우울증은 생각보다 흔했고 어느 누구 심각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까지 힘든데 왜 몰라줄까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나 또한 우울증이 마음만 먹으면 고쳐지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걸리기 전까진 말이다.
내일을 위해 살아야 할까, 왜 내일이 더 나아야 할까.
내일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반드시 오는 날도 아니지 않나?
내일은 누군가에게 기다렸던 하루가 될 수도 있지만 전혀 기대되지 않는 하루가 될 수도, 포기하고 싶은 날이 될 수도 있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살았다고 해서 다음 날, 다다음날까지 점점 더 나은 하루를 보낼 리가 없지 않나?
매일매일 실망하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어제보다 나은 날을 기다리지 않는 게 마음 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오늘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좋은 노래를 발견해서 몇 번은 더 듣고 싶으니까, 오랜만에 본 양떼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천천히 보고 싶으니까, 스타벅스 다음 시즌 메뉴가 궁금하니까, 붕어빵 아주머니가 돌아오면 팥붕과 슈붕 맛은 봐야 하니까, 첫눈을 맞는 설렘을 한 번은 더 느껴보고 싶으니까, 이게 나의 마지막 계절이라면 지금 불어오는 바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으니까.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오늘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오늘은 살아야겠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날 때 어려움을 겪는다면 어제 보낸 하루가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할 이유로 모자람이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난 오늘을 보낸다.
더 이상 내일을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를 사랑할 거라는 다짐을 했다.
자존감을 높이거나 자신감을 채우는 것이 아닌 그냥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죄책감과 열등감을 느끼고, 분노는 참지 못하면서 위로는 받고 싶어 하는 나를 조금은 이해하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는 관대하면서 내 감정에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는 반대로 생각해 보자, 나를 사랑해 보자, 나에게 관대해보자는 막연한 다짐일 뿐이더라도 든든했다.
우울이란 감정은 무섭도록 빠르다.
한번 시작해 번지고 번져 완전히 물들어버리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내일도 우울할 텐데 왜 살아야 하지'라고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분들에게 시간이 약이라고,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뻔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오늘은 살아봐요. 오늘을 살아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