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들
안녕 우울아.
너에게 이별을 고하고자 편지를 쓴다.
수면장애, 트라우마로 인한 과다각성, 스트레스, 강박증 등 네가 데려온 친구들과도 헤어질 준비를 하려 해.
이별예고라고나 할까? 정작 이별의 순간에는 너라는 존재를 잊어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미리 쓰게 되었어.
네가 내 인생에 불쑥 들어와서 놀란 건 사실이야.
먼저 환영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 실은 지금도 환영한다고는 못하지만 '잘 왔어'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데려온 친구들로 고통받던 날에는 아주 많이 밉기도 했어. 나의 무능함, 무기력함, 무계획적, 무모함 등 모든 부정적인 게 너로 인해 시작된 것 같아서 원망도 많이 했지.
내가 나를 미워하기까지 하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네 탓이라도 해야 했어.
아이러니하게도 너 때문에 내가 미웠는데, 너 덕분에 나를 사랑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우리의 첫 만남이 어제일처럼 생생해. 어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어.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던 그저 그런 하루, 금세 지나가고 잊힐 무난한 하루, 수많은 날들 중 하루.
트라우마는 한순간에 오더라.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을 시간조차 내어주지 않더라고.
그저 잠깐의 충격일 뿐이라 생각했어. 그런데 트라우마를 당한 사람 10명 중 1명은 평생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네? 설마 나겠어? 작은 이벤트에도 당첨된 적 한번 없는 나겠어? 싶었는데 요샌 정말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널 만난 후 아주 어둡고 긴 터널을 걸었어 쉬지 않고 걸어야 했지.
아직도 신기해. 그저 그럴 줄 알았던 날이 눈 감는 날까지 잊지 못할 날이 될 줄 몰랐거든.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을 이렇게 알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울창한 대나무숲이 있다면 알려줄래?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혼자 삭히지도 못하고 어디 가서 울분이라도 토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정신과 약은 삼키는데 우울한 감정은 삼키기 너무 힘들어.
네 생각이 날 때마다 눈물을 훔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눈알이 건조해지고 눈 밑이 새빨개질 때, 얼굴이 따끔거려 눈물 닦기도 힘들어졌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 눈물도 사치구나.
눈물이 지나간 뺨이 마르고 닳을 때까지 울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원하던 대학에 불합격했을 때? 사귀던 남자가 군입대할 때?
글쎄, 그때도 이 정도로 울지는 않았던 것 같아.
가끔은 우울하지 않아도 눈물이 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수시로 눈물을 흘려줘야 내 안의 네가 조금은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달까.
더위가 가시면 나아질까, 바람에 흘러가진 않을까, 계절처럼 자연스레 지나가진 않을까,
그렇게 처연해져 버리기 전에 네가 떠나 주길 기다렸는데 어느새 내 일부가 되어있더라.
트라우마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 너를 비롯한 정신질환이 동반되고 심한 경우에는 자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던데, 다행히도 난 좋은 정신과 선생님을 만나 삶의 의지가 생겼고 밤마다 눈물로 마를 날 없던 베개도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어. 그리곤 깨닫게 되었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다는 걸.
그럼에도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건 언젠간 너를 투명인간 취급하겠다는 귀여운 선전포고야.
'언젠간'보다는 '머지않아'라는 부사를 쓰고 싶었지만 쉽지 않을 듯해서.
내가 말하는 언젠가라는 날에는 네가 있는지도 모르게 살고 싶어.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아직은 네가 나의 전부라 그런 날은 꿈속에서도 본 적이 없지만 한 번쯤 상상해보고 싶긴 하다.
영원히 널 잊고 살 거라는 지키지 못할 말은 뱉지 않을게. 아마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할 것 같거든.
다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네 덕분에 난 정말 많이 성장했어. 고마워 진심으로.
이제는 아무리 간절해도 목숨걸정도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그 무엇도 말이야.
삶에 대해 적당히 기대하고 적당한 실망도 해보고,
적당히 사랑하며 살아가보려 해.
네가 준 상처는 천천히 아물어가고 있는 듯해.
어떤 날에는 상처부위가 벌어져 미칠 듯이 아파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에는 흉터가 남아있는 줄도 모른 채 긁는 날도 오겠지.
지금은 상처를 바라볼 정도, 딱 그 정도만큼의 힘은 생겼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전부를 바쳐 널 응원했던 6개월이었어. 앞으로 얼마가 더 걸릴지 모르겠지만 내 안에 있기만 해 줘. 내가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지켜보기만 해 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하며 이만 글을 마칠게.
우리가 멀어지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영원한 너의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