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으로 정신의학과에 방문한 지 두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그동안 착실히 다녔다고 해서 완치되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정신의학과에서는 상담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다음 방문날짜와 시간을 정한다.
완치라고 하면 다음 방문이 없어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내가 갈 때마다 다음 예약일을 잡아주기 때문에 아직 내 우울증은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겠다.
우울증이 완치되기 전까지 마지막 상담일은 언제가 될지, 마지막으로 처방받는 약은 몇일치가 될지 알 수 없다.
몇 개월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우울증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괜찮아졌다고 말하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며 다닐 뿐이다.
6개월 전 내가 받은 진단은 트라우마로 인한 과다 각성, 우울 장애였는데
어쩌면 우울증이 내게 온 순간은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보다 훨씬 더 이전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울증이 온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점점 마음의 병을 키워온 걸 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했던 날들을 미치도록 후회하는 중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뭐든 간에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첫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더 이상 눈물 닦은 휴지로 비숑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눈물을 하도 닦아 눈밑이 빨갛게 부어오르지도 않는다.
여전히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지만 잠도 간간히 자고, 아침마다 '둥근 해 미친 거 또 떴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계절이 바뀌니 아끼던 가죽재킷도 입고 싶고 이유 없이 밖으로 나가고 싶은 날도 생겼다.
또 미세하게 오른 볼살로 나의 끼니에 대한 정신의학과 선생님의 걱정도 덜어주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는 더더욱 아닌, 밥도 잠도 거른 줄도 모르게 거르던 날들은 지났다.
완연한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틈틈이 행복이란 것도 느끼고 있다. 드물게 오는 행복에 잘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사랑하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종종 칭찬해 주곤 있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트라우마 가해자도 아니고 정신의학과 선생님도 아니었다.
내가 나의 유일한 구원자였다.
정신의학과에 처음 방문했을 때 받았던 아침 약과 취침 전 약, '필요시'약은 계속 복용하고 있다. 1~2주간 증상에 따라 약이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지만 처방받지 않는 날은 없었다.
'필요시'약은 말 그대로 필요하다고 느낄 때 먹는 약인데, 극도의 흥분 또는 긴장감과 불안함을 느낄 때마다 수시로 섭취해야 했다.
'필요시'약에 굉장히 의존하며 지낸 것에 비해 작은 알약 따위 삼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울증도 그렇게 꿀꺽 삼킬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필요시’ 약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여전히 나에겐 ‘필요시’ 약이 필요하지만, 먹는 횟수와 알약의 개수가 현저히 줄었다.
현재는 ‘필요시’ 약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서른에 취미 찾기, 작고 잦게 행복 느끼기, 죽기 전에 해보고 싶던 일 해보기 등
나만의 '필요시'가 모여 비로소 행복하다고 느끼는 일상을 보낼 수 있기를.
오늘 나의 '필요시'는 카페 창가에 앉아 아이스라테를 마시며
내가 좋아하는 계절의 설렘을 고스란히 느끼는 이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