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나가보자 치료법 (2) 숨 쉬기
여름의 끝자락
더위가 한 풀 꺾였다. 유난히도 더웠던 올여름도 지나가려나 보다.
난 평소 추위를 잘 타는 편이라 여름을 좋아해 왔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그랬다.
올여름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잊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 같다.
매미소리가 차츰 들려올 때 우울증인 것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우울증 환자라는 것이 믿기지는 않는다.
드라마 <굿 파트너>에서 내연녀가 한 대사가 생각난다.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잖아요. 피할 수 없는."
마치 나에게 우울증이 그렇다.
사랑이 찾아오는 게 빠를까, 우울이 찾아오는 게 더 빠를까.
우울도 교통사고 같다면, 내 우울증은 계획된 교통사고라 말하고 싶다.
단순히 컨디션이 좋지 않고 평소보다 조금 더 울적한 날이라 생각했다. 하루하루 그런 날들이 모여 우울한 감정이 오래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거지같은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교통사고 후 신체만 치료할 수 있을 뿐, 마음은 치료할 수 없다. 몸에도 상처가 나듯 마음에도 상처가 난다. 한 번 남은 흉터는 지울 수 없다.
여름의 끝자락에 서있다.
아직 가을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아침저녁으로 가을 냄새가 난다.
이 더위가 언제 가실까, 지옥 같은 날들은 언제쯤 잊힐까.
내게도 가을이 올까.
선선한 바람이 분다.
계절은 가라고 해도 안 가고, 오라고 재촉해도 빨리 오지 않는다.
그냥, 그냥 기다리면 된다. 손꼽아 기다릴 필요도 없다.
해마다 더위가 일찍 찾아오기도, 장마가 유난히 길기도, 가을이 짧게 느껴지기도, 첫눈이 평년보다 늦게 내리기도 한다.
올해는 더위가 오래간 것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가을의 서막
햇볕이 참 좋다.
아침부터 무기력과 싸우고 밖으로 나왔다. 얼마 만에 맛보는 승리인가.
솔솔 불어오는 가을바람과 흩날려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 나무 그늘 아래 달콤한 꿈을 꾸는 고양이, 오랜만에 켠 에어팟을 통해 들려오는 내가 좋아했던 음악, 그리고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나.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에 나라는 사람이 퍽이나 어울리진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
좋아하는 것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용히 기뻐했다.
백 걸음도 걷지 않은 채 맞이할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밖으로 나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왜 그렇게 무거웠던 걸까.
아마 내일도, 모레도 난 여전히 무기력과 싸워야 할 것이다. 반복되는 이 싸움에서 항상 이길 순 없어도 끝까지 싸우느냐, 항복하느냐는 내가 믿지 못하는 유일한 사람, ‘나’에게 달렸다.
그럼에도 아침마다 무기력과 싸울 수 있는 자그마한 힘,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더 많은 에너지는 필요하지 않다.
내가 삶을 포기했다면 느낄 수 없었던 가을바람, 나뭇잎 소리, 이 선선함, 그냥 지나쳤을 이 계절.
늘 근심 없는 나날을 보낼 순 없겠지만 맑은 하늘을 보며 좋은 에너지를 채울 힘은 놓지 않기를 바라본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