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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아 Oct 17. 2024

인생만 산으로 갈까요

저의 완벽한 등산메이트를 소개합니다

한때 주마다 산을 오르던 시기가 있었다.

땀 흘리는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 등산은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그 당시 같이 놀던 유일한 백수였던 친구가 제안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마지못해 오르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첫 검단산을 시작으로, 북악산, 인왕산, 아차산 등 우리는 서로의 완벽한 등산메이트가 되어주었다.

험난한 길에서 맞잡은 두 손, 얼음을 녹여가며 겨우 마신 물, 다 녹은 초코바까지 나눠먹겠다고 애쓰던 시간들.


산을 오르내리며 한 해를 넘긴 우리는 백수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인이 된 후에는 현생에 치여 산을 오르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6년 만에 다시 백수 신분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입을 맞춘 건도 아닌데 우리는 또다시 동지가 되어있었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은 시기가 같이 오는 건지, 한 명이 때려치우니까 같이 놀고 싶었던 한 명도 때려치운 건진 모르겠다. 


몇 날 며칠을 아무것도 안 하기와 시간 버리기에 충실하던 중, 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퇴사한 이유와 요즘 근황 묻기 같은 건 패스한 채 "등산 갈래?"라고 물었다.

흔쾌히 "yes"라고 답했다. 생각하고 대답한 건 아니었다. 대답부터 나왔고 그다음 생각했다.

퇴사 후 온종일 누워만 있어서 체력이랄 게 없는 수준이었지만, 내 인생도 산으로 가는데 나라고 못 갈까 싶었다.


오랜만에 오른 산은 높이에 비해 무척 힘들었다.

분명 몸은 힘든데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산을 오르며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과정이 정말 즐거웠다. 그렇게 소리 내어 웃어본 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어느덧 정상에 도착했다.

중간에 길을 잃을뻔하기도 하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도 하고, 물병 뚜껑을 꽉 닫지 않아 가방이 다 젖기도 했다. 

이상한 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길도 미리 찾아봤을 테고 물병 뚜껑 닫는 것도 두 번 세 번 확인하기 때문에 실수한 적 없던 내가 길도 못 찾고 물병 뚜껑도 제대로 안 닫았다니.

그런 나를 보며 친구가 말했다. "좋아 보인다. 너."


내려올 때에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이 너무 많이 나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빨리 내려가서 매운 떡볶이를 먹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내려가는 동안에는 친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발에 닿는 바위만큼이나 무거운 이야기였지만, 불어오는 바람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친구는 내 덕분에 생각에 대한 무게가 가벼워졌다며 다음 등산도 함께하자고 했다.


6년 전과 지금, 우리는 많이 달라졌다. 나이는 물론이고 고민거리와 지향하는 것, 꿈꾸는 것들 까지. 많은 것이 변했지만 서로가 서로의 완벽한 등산메이트라는 것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매번 시트콤 같은 일이 벌어지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의 일상을 들으면 내 인생이 심심해 보여, 네 인생에 조연이라도 되고 싶다."

그 후 친구는 내 결혼식에서 축사를 맡았고, 늦게나마 그때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내 인생에 조연이라도 되고 싶다던 너는 처음부터 주연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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