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에서 받은 숙제
정신의학과 선생님이 알려준 우울증 극복 방법 중, 아래 두 가지를 한 번에 해보기로 했다.
1) 취미를 가져보는 것
2) 잘해야겠다는 마음 내려놓는 것
주어진 퀘스트를 빨리 깨내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인지, 하나씩 깨기 귀찮아서 일타이피를 노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나에게 맞는 극복 방법을 알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어떤 것을 취미로 가지면 좋을지부터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추천했던 취미는 '운동'이다.
운동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떤 운동이 나와 맞을지 생각해 봤다.
헬스, 크로스핏은 허리디스크 이슈로 탈락이다. 1년 전 허리 때문에 꽤나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가, 필라테스도 탈락이다. 허리디스크 발병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골프, 테니스는 혼자 하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탈락, 같이하자니 약속 잡기 번거로워서 또 탈락.
러닝은 날씨 이슈, 귀찮음 이슈, 혼자만의 약속은 깨기 쉬움 이슈 등 내키지 않았고, 수영은 연이은 수영장 예약 실패로 좌절감만 맛봐서 운동을 취미로 갖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운동 다음으로 추천 수가 많았던 건 '만들기'였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큰 성공보다는 작고 잦은 성공을 바라는 나에게 무언가 만드는 행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는 것도 있고(?)
비즈 공예한다고 비즈 샀다가 팔찌 몇 개 만들고는 차고 다니지도 않고, 비즈도 처박아두었던 게 생각나서 액세서리 만들기는 탈락.
종이접기, 십자수는 부업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고, 뜨개질은 전에 하다가 잘못 뜬 한코 때문에 전체를 풀어야 한다는 것에 빠르게 포기한 적이 있어서 탈락.
케이크 원데이클래스는 가서 수전증만 확인하고 와서 또 또 탈락이다.
이쯤 되니 취미를 꼭 가져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우울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 그게 꼭 취미가 될 필요는 없지 않나 라는 생각에 취미 찾기 여정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내 오전 일과는 침대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SNS를 탐험하는 것이다.
아직도 대체 어떤 클릭이 나를 베이킹 알고리즘으로 빠뜨렸는지는 모르겠다. 빵을 좋아하는 빵순이도 아닌데 베이킹 영상들이 점차 뜨기 시작하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한때 좋아했던 취미들도 싫어하는 이유 하나씩 만들어서 포기시켰는데 웬 베이킹? 심지어 난 카페에 가도 빵을 안 사 먹잖아.
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 괜히 해보고 싶고 노력 대비 결과물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레시피도 있고 정량대로만 하면 똑같이 나오지 않을까? 다른 요리에 비해서 손맛 같은 건 필요 없을 테니 말이지. 하지만 오븐이 없는 걸 이라며 빠른 포기를 하려던 찰나, 집에 있는 비스포크 큐커(오븐 기능 없음)로도 간단한 베이킹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어서 큐커 베이킹을 검색해 가며 큐커용 베이킹 레시피를 알아냈다.
그 후 베이킹 용품들을 사야 하는데 고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베이킹 도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초기 비용이 꽤 들 것 같은데 한두 번 하다가 말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저렴한 틀이랑 재료 샀다가 빵이 다 타버리거나 맛이 없다면?
그렇게 또 빠른 포기를 했다.
어쩌면 빠른 포기가 내 취미이자 특기일지도.
취미를 찾는 것 말고 잘해야겠다는 마음 내려놓는 것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베이킹이 다시 취미 찾기 후보군으로 급 부상했다. 한번 지배당하면 변하기 어려운 알고리즘 덕분이었다.
눈여겨봤던 베이킹 용품들을 주문했다. 사실 잘 몰라서 블로그보고 똑같이 주문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은 되었지만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이 나이에도 실패를 각오하고 뛰어드는 게 있다니.
블로그에 적힌 레시피를 보며 따라 해 봤다.
무염버터 50g인데 49g 들어갔다면 어떻게든 1g만 더 녹여서 추가하고, 박력분을 포함한 가루류들도 1g의 오차도 없게 정량대로 만들었다. 동일한 재료와 레시피로 똑같이 구웠는데 결과물은 달랐다. 처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눈에 봐도 결과물이 달랐다. 웃음이 났다.
정량대로 했는데도 실패할 수가 있구나, 베이킹도 결국 사람이 하는 건데 애초에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질 거라 생각한 게 말이 안 됐다. 한입 베어 물었는데 또 웃음이 났다. 밖에서 사 먹은 것만큼 맛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내가 만든 거라고? 팔아도 되겠는데.
1시간 베이킹을 보고 따라 했는데 정확히 정리하는 시간까지 총 3시간 50분을 써놓고, 시간대비 아쉬운 결과물을 만들어놓고 뿌듯함은 하늘을 찔렀다.
내가 해봤던 것, 잘했던 것을 할 때보다 성취감은 더 컸다.
거실까지 벤 빵냄새도, 베이킹 도구들로 가득 찬 싱크대도, 바닥에 살짝 쏟은 박력분마저도 어째서인지 싫지가 않았다.
그제야 정신의학과 선생님이 이야기해 준 '잘해야겠다는 마음 내려놓는 것'을 드디어 시작한 것 같았다.
칭찬의 포도알 붙이기 판에 처음으로 붙여진 보라색 스티커 하나처럼.
베이킹을 하고 나면 작은 입자의 가루들은 물론이고 뒤엉킨 반죽 때문에 일반 그릇보다 설거지하기가 힘들다. 주변도 개판 오 분 전이다. 만드는 과정도 과정이지만 수습하는 데에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빵 틀은 긁히지 않도록 부드러운 솔로 닦아내야 하고 버터나 계란을 풀었던 계량컵은 미끌거리지 않게 더 힘을 줘서 닦아야 한다.
사용한 도구에 따라 담았던 재료에 따라 닦는 방법도 다르고 닦을 때의 강약조절도 필요하다. 잘 닦지 않으면 다음에 시작할 때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회사를 5년 넘게 다니며 쉬지 않고 일만 했다. 쉬는 날에는 돌아다니기 바빴다.
일할 때에도 바쁘게 쉴 때도 바쁘게. 그렇게 매 순간 모든 힘들 쏟아보니 하루아침에 방전된 게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우울증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매 순간 날 쏟아붓고 있진 않을까.
그렇다면 난 이 우울증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완전히 고장 나 버려 다시 고쳐쓸 수 없을 때가 아닌 방전에서 끝이 났으니.
오븐을 샀다.
빵 한번 구워놓고 바로 오븐이라니 오버하는가 싶었지만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잘해야겠다는 마음 내려놓기'를 제대로 하고 싶어 져서 말이다.
빵이 타버려도, 틀에서 반죽이 떨어지지 않아도, 맛이 없어도 괜찮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
그냥 다 괜찮아. 난 괜찮아.
+ 사진으로 남겨보는 베이킹 후기
1. 희망 편
버터쿠키, 파운드케이크, 마들렌, 커피콩빵
2. 절망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