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킁킁 킁킁”
생각날 때마다 식초병 뚜껑을 열고 코를 박았다. 먼저 코로나와 후유증을 앓았던 회사 동료는 익숙한 냄새를 틈틈이 맡는 게 후각을 되돌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를테면 핸드크림, 비누 냄새 같은 것들. 하지만 보름이 다 되어가는데도 조금의 맛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누 따위로는 안 되어 더 강한 냄새를 찾아 코를 자극하곤 했다.
음식을 먹어도 질감이나 온도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간 먹어온 공력에 기대 맛을 상상해가며 먹었다. 내가 무슨 장금이도 아니고 머릿속에 맛지도를 그리며. 쳇, 정말 흥이 안 나는 일이다. 맛을 못 느끼니 굳이 맛있는거 시켜먹을 필요 있나 대충 때우지 싶다가도, 코로나 씩이나 걸렸는데 잘 회복해야지 싶어 아무거나 먹을 수도 없었다.
놀랍게도 후각 미각을 잃고 가장 먼저 찾지 않게 된 건 커피였다. 어차피 코로나로 맛도 못 느끼는 데다 두통이나 피곤함 같은 카페인 금단증상은 코로나 증상과 다를 바 없었기에 인생의 3대 재미 중 하나였던 커피가 곧바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삶이란 게 그렇다. 최고에서 눈 밖에 나기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와 난다 나! 맛이 나!” 딸기가 이토록 신묘하게 새콤달달한 과일이었나. 왜 딸기맛 사탕이랑 젤리랑 아이스크림이 인기 있는지 알겠다. 꽉채운 3주 만에 세상과 나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걷혔다. 먹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 마침 졸업시험도 끝났겠다 남편과 중국집 런치코스를 먹으러 갔다. 코로나 이후 그것도 둘이서만 외식을 한 게 첨이니까 2년 만인가. 중국집 옆 자주 가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호기롭게 아이스라떼를 테이크아웃했다. 3주간 고생했다! 커피 너 오랜만이다! 술이나 담배도 아니고, 끊을 생각이 없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3주 만에 커피를 마신 그날 밤, 심장이 나대었다. 심장 뛰는 설레는 그 느낌 어쩌고 하며 글을 쓴 나의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을 만큼 불쾌했다. 낯익은 기분. 지진 트라우마가 공황 증세로 나를 덮친 날 알게 된 어찌할 바 모를 그 느낌적 느낌. 심장 뜀을 공황으로 인지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공황이 와서 심장이 뛴 건지 선후관계를 알 수 없지만 깊은 심호흡을 하며 잠을 청했다.
이후 카페인 든 커피를 (거의) 끊었다(‘거의’가 된 건 이 글을 쓰는 오늘 한잔 마셨기 때문이다). 집에서 드립해 마시는 원두로 디카페인을 사고, 카누 더블샷라떼를 대신해 카누 디카페인 라떼를 샀다(그 와중에 카누 디카페인은 왜 ‘더블샷’이 없나 투덜대며). 디카페인 커피로의 안착이 스무스하진 않았다. 20년 넘게 커피를 달고 살았기에 디카페인 원두의 미묘하게 다른, 약간은 화학성분 같은 맛 때문이었다. 로스러리 카페 곳곳을 들러 시켜먹어 봐도 그 맛이 거슬렸다. 그러다 최근 한 카페에서 괜찮은 디카페인 라테를 발견했다.이쯤 되니 그냥 디카페인 원두에 길들여진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든다.
커피를 물처럼 마시다 하루 한잔 오전에만 마시다 이제 그마저도 디카페인만 마시는 신세지만 어쩐지 싫지 않다. “디카페인 발명한 사람 상 줘야 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수영 후 그 맛난 디카페인 라테를 파는 카페로 자전거 패달을 밟을 때면 속도 없지, 막 신이 난다. 마침 이어폰에서는 원슈의 ‘존재만으로’ 가 흘러나오고. 하, 좀 멋진데. “이제 뭘 못하게 된 신세”라는 한탄 대신 “커피를 마실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야. 아이스도 아직은 거뜬하고.” 안도하는 내가 좋다.
노화감정은 노인 세대에만 있는 게 아님을, 갑작스럽게 돌아온 미각처럼 깨닫고 있다. 여전히 젊은 정신과 그를 따라잡지 못하는 몸과 마음이 끈 떨어진 인형극 인형처럼 덜렁거려 그 셋 사이를 이어 붙이는 데 에너지를 쓰는 나날들이지만, 어쩐지 괜찮고 나는 안온하다. 그러면 그런 대로 잘 늙어가는 기분이 들고 스스로가 대견해져 디카페인 커피를 다디 달게 호로록 마셔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