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종교적인 가치관과 인간의 본성 사이에서 계속되는 고민의 지점들을 보여준다. 성에 대한 고민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작품을 보면 성 관념에 대한 여러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헤르만헤세 뿐 아니라 성에 대한 문제는 참 유구하고도 오래된 인류의 숙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인간의 수많은 번뇌를 낳기도 하고, 사랑의 기쁨을 주기도 하며, 창조의 신비로움을 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혼의 성향은 인간의 성향으로 반영된다고 했는데, 사실 그것들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것이 성적인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적인 부분은 인류가 살아오며 그에 대한 수많은 논의와 또 관념이 들어가 있는 부분이기도 하며, 본능과 쾌락이라는 지점과 맞닿아 있어 균형있는 시야를 유지하는 것이 또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간에게는 성에 대한 여러가지 인식이 있다. 정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순수하게 도파민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조금은 불편한 마음을 가진 사람, 아예 그 부분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 즐긴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마음 속에 깊은 제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내면에는 이글이글함이 타오르지만 차마 그것들을 드러내지 못하고 누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성적인 이슈, 에너지적인 관점
사실 성적인 부분은 누구나 갖고 있는 인류 공통의 주제이니만큼 에너지적으로도 굉장히 큰 의미가 있고, 큰 의미가 있는 만큼 우리 본연의 모습을 잘 드러나게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관계시에는 사실 육체적 쾌락 이상의 에너지 교환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교환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한쪽이 더 많이 가져갈 수도 있다는 것이고, 필요한 에너지를 서로 적절히 채워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에너지의 교환 형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각 영혼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성역할에 대한 받아들임
성관계시 자신의 육체에 드러나는 여러 현상들은 자신의 성별에 대해서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 자신의 성역할에 대해서 영혼과 자아가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지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다. 영혼들은 한쪽의 성별만 살아가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생의 목표에 따라 왔다갔다 하면서 경험하기도 한다. 여러 여정을 통해서 양쪽을 아우를수 있는 시야를 갖추어나가는 경험을 하는듯 보이기도 하다. 성적인 정체성의 문제도 '영혼들의 공부'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럴법할 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다양한 경우에서 겪을수 있는 상황들에서 양쪽 성별을 아우를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번 생에 특별히 성적으로 불쾌한 경험이 있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성역할에 대해서 힘들어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것은 전생의 기억으로부터 그런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우리의 전생에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드라마가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전생이 많고 특별히 한 전생이 트라우마로 남았을 수 있는데, 이러한 전생이 펼쳐지는 이유도 해당 영혼이 해당 문제에 있어서 어떤 답을 찾고싶어서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혼자 거슬러올라가기란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현재 나에게 펼쳐져 있는 현상과 사고에서 막힘이 있는 지점을 하나씩 끌러나가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최근에 결론을 내린 것은 지구에서 성에 대한 많은 혼란스런 관념들이 생긴것은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거의 대부분의 인류의 역사가 극과 극을 오가며 진동을 해 왔지만, 성적인 부분이 특히 그러한 듯 하다. 지극히 쾌락을 추구하던 시기를 지나 그의 반동적 에너지로 지극히 육체를 부정하는 시기를 지나 왔고, 또다시 반대 극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도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회 질서를 위해, 혹은 성관념에 있어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 여러 관념들이 유행했다가 사라졌다.
정말 많은 사조와 설명방식이 있지만, 성에 대한 여러 가지 관념들은 '육체는 영혼의 표현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 좀더 깊은 받아들임이 있다면 많은 가지들이 쳐지고 저절로 정리되는 부분이 있을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라는 말은 무슨 요즘 신세대들의 쿨한 성개념 같지만 따지고보면 매우 고루한 관념이기도 하다. 오랜시간, 여러 문화권에서 몸따로 마음따로의 관념은 영향력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랬고, 대부분의 문명에서 그랬다.
전통적으로 종교인들은 육체에 대해서 굉장히 금욕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이는 정신과 육체를 따로 분리해서 보려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의 반대극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해보자. 몸 따로 마음따로 맺을 수 있는 관계들이다. 전통적인 가치관에서는 굉장히 배척하는 그런 일이 사실은 같은 뿌리에서 파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려고 하는 것이 도파민인가,
혹은 내가 가진 극단성을 알아차리고 싶은 것일까
앞서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란 주제로 글을 썼는데, 특히 성적인 이슈에서 이러한 부분이 많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 부분을 전혀 부끄럽게 느끼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세상에 많은 성적인 서비스들이 대부분 음지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역시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모습'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성적인 부분은 그 특성상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찾고, 그것에 중독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자칫 그 자체에 풍덩 빠지기도 쉬운 것 같기도 한데, 사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극단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단지 그것이 단순 도파민인지, 내가 가진 극단성의 지점을 구분하는 것은 본인의 현명함일 것 같다.왜냐하면 중독적인 것은 말 그대로 너무도 중독적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영혼의 바람의 크기에 따라서 자기 길을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영혼들이 '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는 여러가지 루트가 있는데, 그것은 일상의 이벤트, 주변인과의 갈등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하지만, 아주 심연의,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모습은 성적인 순간에 드러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인간만의 성향은 아니며, 영혼 깊숙이 숨겨놓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제로 성관계시 드러나는 많은 모습에서 그 사람 자체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상식으로 퍼져 있기도 하다. 그 당시에 드러나는 모습이 그 사람 전체는 아니겠지만, 본인이 숨기고 싶어하는데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버리는 어떤 모습들이 있을 것이다. 특정 대상에 대해 드러날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이 숨겨져 있다가 어느 날부터 드러나는 때 들이 있고, 또 특정 상황에서만 그런것들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런 모습을 내가 받아들이기가 힘든가? 꺼내놓기가 힘든가? 숨기고 싶은가? 그럴 수 있다고 괜찮은 척 하고 있는가?그렇다면 그 부분은 사실 잘 관찰해야 할 지점인지도 모른다. 그 모습 전체가 당신의 모습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다음 스텝을 위해서 인식을 개선해야할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몇가지 테마로 짚어볼 수 있다. 이성에 대한 숨겨져 있는 경계심과 적개심/
의존성/집착/ 결핍감/한 존재를 대하는 시선/ 등등 우리가 평소에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하는, 영혼의 심연의 감정이다.
성적취향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것은 서로만 맞으면 문제가 없다(?)
라는 이야기는 어떤 부분에서는 맞고, 어떤 부분에서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영혼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굴레라고 하는 것은 '특정 상황에서 특정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에너지이다. 내가 선택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에너지를 말한다. 다른말로 표현하면 극단성을 계속해서 발현하게 되는 어떤 지점을 말한다. 그 극단성에서 벗어나 보다 중심에 가까운 에너지를 획득하고 싶은 영혼이라면, 자신이 극단성을 발현하게 되는 어떤 지점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고, 보다 중심의 가치관으로 향할 수 있는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다.
나와 상대방은 양극단이 자석처럼 붙은것이다. 그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의 본연을 모습을 드러내면서 지극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계속해서 서로를 그렇게 보완해주고, 그것을 진짜 원하는 상태라면 그렇게 계속 지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원하는 것이, 서로를 통해 극단성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각자가 자신 안의 양 극단을 줄여나가고 싶은 영혼들이라면, 서로를 통해 자신의 어떤 모습들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중심점을 다시 찾아나갈 것이다. 더 균형있고, 더 조화롭게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들을 배워나갈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어떤 극단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받아준 상대방은 물론 자신도 같은 양의 극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상대역이 된 것일 거다. 이런 관점에서, 상대방은 어떤 숨겨진 욕구의 배출구가 아니라 숨겨진 나의 모습을 받아준 고마운 대상이 된다. 내가 음지로 숨겨두었던 나의 어떤 부분을 수면위로 끌어올려준 사람이 된다. 나 자신을 더 깊게 사랑하게 해준 상대인 것이다.
이 글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생적으로 영혼 자체가 이런 이슈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태생이 쌍둥이불꽃이기도 했으니, 존재간의 관계성의 에너지를 긴밀히 다시 잡아가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랜 고뇌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생에 이르러서도, 나는 여성으로서의 내 육체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고, 몸과 정신의 분리감때문에 힘들었던 기억, 그리고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자신의 모습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시간들이 있었다. 이것은 나만의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기도 했고, 전통적인 관념을 뛰어넘어 나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길이기도 했고, 오랜 영혼적인 숙제를 푸는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주할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느끼는 수치심의 깊이만큼 스스로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좀 더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고, 그만큼 나를 다시 보완해 나갈 수 있었으며, 나를, 그리고 남을 좀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성관계의 본질은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나란 존재가 영혼깊이 사랑받고, 숨김 없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받아들여주었으면 하는 마음, 나 또한 누군가를 깊이 받아들여보고 싶은 '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외로움을 못 이기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내면 깊은 곳에 이런 마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그 어떤 모습도 누군가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 말이다. 나의 그 어떤 모습,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 자신과 타인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며, 타인과 더 조화로울수 있는 새로운 중심으로 향할 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