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같이 살아라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엄마 아빠가 어딘가로 가서 집이 비기를 기다렸다. 엄마 아빠가 없다고 집에서 뭘 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이랑 새벽까지 비행청소년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난 그 시절 별 이유 없이 엄마 아빠가 집에 없기를 바랐다. 해방감. 그땐 해방감이 절실했다.
그때마다 했던 건 밤에 거실 불을 다 끄고 윤도현의 러브레터(시간이 지나서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같은 음악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낙이었다. 엄마 아빠가 시간이 몇 시인데 자야 되지 않냐고 재촉하며 맨 마지막 가수는 어물쩡 넘기는 게 아니라 끝까지 다 보는 일. 조용하면서도 마음이 한껏 가득 해지는 그 느낌. 그게 너무 좋았다.
언젠가 엄마가 식탁 위치를 TV가 잘 보이는 방향으로 돌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모두 공평한 시야 확보가 가능했는데, 얼마 안 가 식탁 위치가 다시 바뀌었다. 엄마한테 이유를 묻자, 다 TV만 보고 먹는 게 이상해서 다시 바꿨다고 했다. 아마 엄마한테는 밥을 먹는 건, 밥을 ‘같이’ 먹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마음을 처음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 편인 것 같다. 나는 혼자서 밥을 먹을 때는 좋은 말로는 간단하게, 안 좋은 말로는 초라하게 먹는다. 우선 혼자 끼니를 해결할 때 많은 과정이 있는 게 귀찮고, 대화를 하지 않는 식사, 그러니까 마주 앉은 사람과 어떤 유대감을 형성하지 않으면서 해결하는 식사는 왠지 묵묵히 입에 음식을 욱여넣기만 하게 된다. 원체 음식이라는 카테고리에 예민하거나 흥미롭게 여기는 타입은 아니라 그런지, 맛을 음미하는 것만으로 즐겁고 기쁜 식사가 되진 않는다. 나에겐 아무래도 식사는 맛의 경험보다는 관계의 경험, 일종의 휴식의 경험에 가깝다.
그래서 혼자 살 때는 정말 편했고, 정말 외로웠던 것 같다. 맛있다고 소문난 떡볶이나 치킨을 먹어도 맛있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영상을 틀어놓은 새벽에도 계속해서 공허했다. 누군가가 그리운 걸까, 싶으면 누가 그리운 지도 알 수 없었다. 조용한 새벽을 즐기던 학창 시절의 나는 어디 가고, 무언갈 계속 채우고 싶어 했다. 그러다 문득 ‘편하게 살고 싶다면 혼자 살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같이 살아라’라는 말을 듣게 됐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누군가와 함께함으로써 이뤄낼 수 있었던, 혹은 누군가와 함께이길 바랐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연애나 결혼같이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일들에 대해서 귀찮음을 느끼는 분들이 종종 ‘이것저것 맞춰가는 게 싫다’라는 뿌리를 가지고 귀찮아하실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엄마 아빠가 없는 집에서 윤도현의 러브레터를 보고 싶었던 것처럼. 여튼간에, 그런 생각이 든다면 아직까진 편하게 사는 게 본인의 삶에서 더 중요한 부분일 것 같다. 나도 전엔 완전히 이쪽이었다. 누군가를 신경 쓰고, 누군가와 규칙을 정하는 그 귀찮고 불편한 일을 사람들은 왜 굳이 굳이 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변한 건 계기는 딱히 없는 것 같고, 그저 인정했던 것 같다. 편해서 좋은데, 자꾸 뭔지도 모를 대상을 찾곤 했다. 아마 행복하고 싶었던 거겠지.
편하게 살고 싶다면 혼자 살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같이 살아라. 나는 얼마 전에 ‘나쁘게 사는 건 쉬운 일이고, 착하게 사는 게 어려운 일이다’라는 얘기를 했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다만 편한 것과 행복한 것 중 어떤 것이 더 우위에 있다는 걸 따져보자는 건 아니고, 그저 본인에게 어떤 존재 방식이 중요한지 알고, 그 존재 방식이 꺾인다면 유연하게 꺾일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정이 어떤 단계로 나아가며 자아를 찾게 만드는 게 아닐까?) 아무튼, 맞춰감에서 오는 불편함도 일종의 행복, 어떤 종류의 사랑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