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은 May 31. 2022

아빠가 경상도 남자라 그래

Day-off fiction 3


“아빠가 경상도 남자라 그래”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서운함이 허상처럼 느껴졌다. 또한 허무함이 있었고, 억울함이 있었다. 경상도 남자인 게 무슨 벼슬이라서 남한테 상처를 줘도 되는 건데. 이어서 엄마는 자기한테도 평생을 사랑한단 소리를 안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 거라고. 선이 네가 이해하라고. 선이는 아빠가 부러웠다. 남한테 상처를 주고도 이해받는 쪽에 있을 수 있다니. 그건 선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가질 수 없는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선이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고, 엄마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너무 넘치게 사랑하고, 아빠는 너무 부족하게 사랑한다. 엄마는 체면을 너무 쉽게 뭉개고, 아빠는 체면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 엄마는 너무 정이 많고, 아빠는 정이 서운할 만큼 없다. 엄마는 너무 참으면서 살고, 아빠는 참으면서 살지 않으려고 한다. 엄마는 너무 자주 미안하다고 하고, 아빠는 미안하단 말을 아끼면서 산다. 이렇게 다르게 존재하는 두 사람이 부모라는 것, 그런 두 사람이 가족이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건 선이 에게는 너무 복잡한 사실이었다. 


“아빠한테 잘해줘 선이야. 그래도 아빠잖아” 


아빠도 선이를 사랑해. 아빠도 선이를 생각해.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선이는 대답 않고 밥을 욱여넣었다. 그런가.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모르는 건가. 그날은 가만가만 천장을 눈으로 훑으며 그런 생각을 길게 하다 잠에 들었다. 일어나서도 고민이 이어졌다. 그래도 아빠잖아, 라는 말은 왜 아빠에겐 적용되지 않는 걸까. 경상도 남자니 뭐니 해도 아빠잖아. 그럼 잘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표현 못하겠어도 노력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오랜만에 다 같이 밥을 먹다 헤어진 남자 친구 정우의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 친구는 이젠 안 만나? 분명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빠는 관심받고 싶어 짓궂은 장난을 치는 초등학생 남자애처럼 일부러 튀게 행동했다. 안 만나. 왜? 아빠는 쩝쩝 소리를 내며 ‘어디 한 번 이유 좀 들어보자’하는 여유로운 포즈를 하고 선이를 쳐다봤다. 그때 아빠는 정말, 대한민국 중년 남성 같았다. 날 힘들게 해서. 선이가 말했다. 아빠는 ‘그럼 그렇지’하는 뉘앙스로 태도를 취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 가지고 헤어지면 안 되지. 그럼 뭐 때문에 헤어져야 되는데? 선이가 꼬투리를 물었고, 아빠가 가르치듯 대답했다. 한두 번 실수하고 그런 거 가지고는 용서를 해줘야지. 그때 선이는 엄마를 쳐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엄마. 엄마는 아빠 몇 번이나 용서했어?”


아빠의 얼굴이 구겨졌다. 엄마는 다급히 싸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 웃었지만, 아빠는 선이의 당돌함이 어지간히 불편한 기색이었다. 저녁상이 정리되고 엄마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엄마 뭐 봐? 선이가 애살맞게 엄마의 품에 파고들었고, 엄마는 투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으로 선이를 끌어안았다. 이거, 산속에서 사는 사람들. 자연인들 사는 거 봐. 선이는 엄마와 함께 프로그램을 가만히 감상했다. 속세를 떠난 남자 자연인. 결혼은 하셨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했지. 했었지.라는 과거형으로 대답하는 그들. 직장을 다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술도 많이 마시고 살다가 집사람과 이혼을 했다는 비슷비슷한 이야기들. 그러면 자식분들도 계세요? 있지. 집사람이랑 살지. 리포터가 보고 싶으시겠어요.라고 말하자 마음속 어딘가 남아있는 뿌듯함을 담아 가끔 봐요.라고 하는 자연인. “가끔 집사람이랑 반찬 같은 거 해다 주고 그래요. 그럼 요 산 밑에서 만나지”선이는 급격히 표정이 굳어졌다. 


“엄마, 엄마는 이거 재밌어?”


“응 엄마는 재밌는데. 선이는 재미없어?”


“맨날 똑같아. 남자는 사업하다 망했고 여자는 그래도 반찬 갖다주고 용서해줘”


엄마는 선이의 짧고도 정확한 요약이 웃겼는지, 크게 웃었다. 그렇지만 그때 선이는 엄마의 웃음 속에서 선이가 세상에 없었을 시간에 묵묵히 용서하고 살았을, 아니 용서밖에 방법을 몰랐던 엄마의 시간이 느껴졌다. 이런 불쌍한 엄마를 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엄마 나 가볼게. 엄마는 아쉬움으로 뒤덮인 얼굴을 하곤 선이를 배웅해줬다. 다시 돌아간 자취방에는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냉기만 가득했다. 선이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편하다. 그런데 차갑다. 가로등마저 꺼지고 캄캄한 방 속에서 선이는 깨달았다. 혼자 산다는 건 전등을 혼자 가는 방법을 유튜브로 터득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혼자 산다는 건, 이 차가운 어둠 속에서도 매일매일 잠드는 것이라는 걸. 

작가의 이전글 그건 사랑이 아닌 거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