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만들기 기술
바람소리에 담겨 있는 들리듯 말 듯 한 고목의 울음. 지나간 세월에 대한 후회 때문인가? 인연들에 대한 애처로움 때문인가? 모진 비바람에도 꿋꿋하던 가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허약함 때문인가? 텅 빈 자신의 지나간 흔적에 대한 허망함 때문인가? 그럴 때마다 깊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달래줄 자신만의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그중 하나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 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 가게 살다 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 잔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두어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처럼 타 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마음이 쓸쓸해지면 듣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따지고 보면, 우린 모두 “산기슭의 하이에나‘이었고, 또 저 높은 곳을 오르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느 듯 바람 속에서 간간히 들려지는 지나간 세월에 우는 ‘고목’이 된다.
그러나 노랫말처럼,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 되지 않겠는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말이다. 그럼 무엇으로 흔적을 남기겠는가? 치적비나 묘비에 흔적을 남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산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줄 첨단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순간들을 모은 사진도 좋고, 여기저기에 남긴 내 표현의 파편도 좋다. 그러나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자신의 지나간 이야기를 정리하여 스스로 남기는 것’이다. 바로 ‘글’이다.
나의 삶도 21세기 인류의 발전에 한몫을 다했으니, 나의 경험과 생각과 아이디어도 작든 크든 남겨야 될 유산이자 의무다. 스스로를 초라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흔적을 글로 남기는 것 자체를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이 접하여 왔던 너무나 훌륭한 글들이 자신의 글과 비교대상으로 삼음으로서 만들어진 어이없는 열등감 때문이다. 우리는 글로 먹고사는 문필가가 아닌 이상, 뛰어난 글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생생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오히려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럼 ‘글을 쓰는 단계’ 이전에 ‘글을 만드는 단계’를 또 ‘하나의 완성품’으로 보면 어떨까. 바로 ‘정형화된 글틀’ 속에 생각이나 경험의 조각들을 적어 넣는 ‘글 만들기 기술’로 말이다.
그런 다음 자신이 만든 하나하나의 ‘글틀’ 들을 현대문명의 이기인 자신의 블로그나, 전자 문서에 보관하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영화 <나랏말싸미>처럼, 세종실록에 기록된 ‘신미’라는 스님에 대한 단 한 줄의 단서가 명화를 탄생시키듯이 우리의 기록이 먼 훗날 하나의 멋진 이야기로 부활할지. 현대 과학은 멀지 않아 기록된 이런 ‘글틀’ 들만으로도 한 권의 책을 아름답게 꾸며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멀지 않은 시대에 AI가 당신이 살아간 시간과 장소와 시대 상황에 대한 각종 자료를 찾아내고 조합하여 훌륭한 전기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글쓰기를 자주 하다 보면 작가들처럼 이 “글틀‘ 들로부터 자신만의 문장을 끄집어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 그럼, '글 만들기 기술'로 정형된 ‘글 틀’에 한 편의 생각을 넣어보겠다. 기승전결 방식의 글틀이다. 글의 성격에 맞추어 얼마든지 달리할 수도 있겠다. “‘옛 맛’을 찾아서”란 글의 틀이다. 나무줄기이고 건물의 뼈대와 같으니 천천히 나뭇잎을 붙이고, 살을 바르면 완성된 글이 될 거다.
몇 번이고 보는 흥미진진한 영화들(예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터미네이터 등)도 영화 전체에 ‘기·승·전·결’이, 그리고 ‘기·승·전·결’ 속에 다시 작은 ‘기·승·전·결’이라는 덧을 놓아 독자들의 눈길을 꼭 붙잡고 있다. 요즘 가장 뜨거운 ‘오징어 게임’도 기에서 흥미와 반전, 여섯 가지 게임도 반전의 연속이고, 결에서 다시 반전 속에 이 작품의 의미와 철학과 여운이 있음도 그렇다. 하여간 재미는 예상을 벗어나는 반전에서 강하게 작용하니, 기승전결로 글이 전개되어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자유로운 상상의 일부가 글쓰기니 어디 형식에 구애될 이유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