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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석 Jan 01. 2022

‘2022년 첫 태양’을 바라보며.

 지나간 해가 다사다난한 해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2021년은 더욱 그러했지요. 코로나19라는 '어둠의 괴물'이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아직도 그 어둠 속에 우리를 가두어 두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올리는 지금, 2022년의 첫 태양은 그 빛이 너무나 강렬합니다. 분명 이 강열한 빛이 어둠을 걷어내고 우리 모두를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함께’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글은 2020 울산매일신문의 요청으로 게재한 신년 기고입니다. 과거를 되짚어 보고 ‘어제보다 걸음 나은 오늘 만들자는  자신의 구호를 외치며 신년을 맞이해 봅니다.


2020년 01초. 수많은 시민들의 환호 함성 속에서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첫 타종’이 전국에서 울렸습니다. 울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첫 타종에 소리 높여 환호했다고 금방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어둠은 더 깊어지고, 추위와 바람소리는 더 강해집니다. 밤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던, 올해의 첫 태양은 ‘하루의 삼분의 일’이나 지나서야, 정확히 ‘7시간 31분’을 지나서야, 울산 간절곶부터 오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해의 소망으로 ‘부(富)’나 ‘명예’를 빌어봅니다.


그럼 우리의 끝없는 소망인 ‘부(富)’은 어떤가요? 사실 지금은, 굶주리며 넘겨야 했던 ‘보리고개’, 갑부가 아니면 언감생심인 ‘자가용’, 어딜 가나 한나절도 더 걸려야 했던 ‘비포장도로’,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삼배나 밀가루 포대로 만든 ‘겨울옷’, 얼음물로 빨래하던 ‘개울가’, 뭐 이런 것들은 지금 ‘구석기시대’의 문화유산쯤으로 여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먼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인당 GDP가 1백 불’에 불가하였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거의 일생을 가야 할 먼 길도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고, 지구 반대편의 친구와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세계의 모든 소식을 초단위로 알 수 있고, 수많은 편리한 전자기기나 가전제품이 보편화되었고, 우리 몸에 생기는 병까지도 매일 점검해볼 날도 멀지 않았다니 얼마나 살맛 나는 ‘부자 세상’이란 말입니까? 과거엔 꿈도 꾸지 못하였던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일인당 GDP 3만 불’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그럼 이 풍요는 그냥 온 것인가요? 긴 어둠과 찬바람을 견디어야 맞이할 수 있는, 만물의 생명을 키우는 ‘말없는 태양의 축복’처럼, 엄청난 고통을 견디며 후손들에 물려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의 말없는 축복’입니다.


우리의 또 다른 소망인 ‘명예’는 어떻습니까? 그냥 남을 위하는 ‘마음의 태양’을 띄우기만 하면 그 광명에 ‘명예’가 따를 듯한데, 갈수록 심해지는 ‘욕망’이 문제입니다. ‘명예가 부(富)의 산물’ 인양 돈에 대한 끝없는 ‘집착’, 권력도 부의 수단과 연결시키는 터무니없는 ‘욕심’, 자신으로만 향하는 ‘이기심’,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순간만을 모면하려는 ‘이중성’, 비교에 비교를 거듭하는 무조건적인 ‘질투심’, 뭐 이런 것들이 우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사회 지도층에서 조차도 ‘배려니 양보니 하는 큰마음’을 찾아보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이러니 과연 우리 사회의 ‘정신적 레벨(수준)’이 점점 궁금해집니다. 과거, 읽었던 책(의식혁명, 운동 역학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으로 판단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마슬로우(미국 인간 심리학자)의 ‘5단계 설 (생리적 욕구 → 안전의 욕구 → 애정과 소속의 욕구 → 존경과 지위의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 보다는 정량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 인간의 최고의 에너지 레벨(수준)을 1000이라고 하면, 가장 낮은 단계인 ‘수치심과 굴욕’은 20입니다. 여기서 수치는 대수(로그)라고 합니다. 에너지 레벨 1000은 10의 1000 제곱, 20은 10의 20 제곱이 되지요. 그러니 이 두 경우 에너지 크기의 비교는 사실상 불가합니다. 그다음은 ‘죄의식과 비난(30)’ → ‘무기력과 절망(50)’입니다. 이 세 단계에서는 ‘마음의 어둠’이 너무나 강하지만, 기다리면 시간이 해결해 준답니다. 그다음은 ‘슬픔과 후회(75)’ → ‘두려움과 근심(100)’ → ‘욕망과 갈망(125)’ → ‘분노와 미움(150)’ → ‘자존심과 경멸(175)’의 순으로 에너지가 높아지지만, 아직은 하루로 치면 새벽 정도입니다. 이 단계를 지나면 ‘용기와 긍정(200)’에 이릅니다. 남을 중시하는 단계지요. 일출에 해당합니다. 여기를 넘어서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하지요. 그다음은 ‘중용과 신뢰(250)’ → ‘자발성과 낙관(310)’, 그다음 ‘포용과 용서(350)’ → ‘이성과 이해(400)’를 거쳐, 타인의 행복이 중요 관점이 되는 ‘사랑과 존경(500)’에 이르고, 그다음 스스로의 ‘기쁨과 고요함(540)’ → ‘평화와 축복(600)’의 단계입니다. 여기를 지나면, ‘깨달음(700-1000)’의 단계에 이른다고 합니다. 중천에 있는 태양과 같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며 인류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예수, 석가, 공자와 같은 성인의 경지라고 합니다.


각 단계의 ‘말이나 글’도 같은 레벨(수준)을 가진다고 하니, ‘이 시대의 어른들의 말과 글’을 보면 그 수준도 짐작할 만합니다. 이제 인류 전체는 문명의 발전에 힘입어 ‘용기와 긍정’ 단계로 도약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부자들도 전 재산을 기부’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하긴 우리의 과거 당대 어른들도 붓을 들고 ‘명필이든 아니든’, ‘필력이 있든 없든’, ‘글의 힘’이 널리 퍼지를 빌면서, 최소한 널리 퍼지길 비는 척이라도 하면서, 옛 성현들의 에너지 레벨이 높은 글을 명절 때마다 남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마음을 거기에 맞추어 나가고, 그들을 존경하였던 사람들도 그 글의 힘으로 큰 정신을 되새겼습니다. 그러한 힘들이 모여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도약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하여간 ‘부(富)’만 가지고는 이 시끄러운 세상을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드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소박한 소망에 더하여, ‘말과 글의 힘’을 빌어 우리 ‘세상이 아름다워’ 지도록, 올 한 해는 “화기 만당(和氣滿堂, 화목한 기운이 온 집안에 넘침)”, “대도무문(大道無門, 큰 도리나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음)과 같은 옛 좋은 글귀를 우리의 마음에 새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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