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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과 Jul 12. 2022

오늘도 인류애 상실

“어떻게 인류애를 잃지 않을 수 있나요?”


당신은 인류애가 있는 사람인가.

예 혹은 아니오.


나는 이 질문에 자주 ‘아니오’라고 대답해왔다. 인터넷상에서 가볍게 쓰이는 ‘인혐(인간 혐오)’라는 말처럼 인간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인간을 필요로 하고 사랑하는 쪽에 가깝다. 다만 인류 전체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주저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난 전 인류를 사랑할 자신은 없다.


어떤 이들의 악의는 불쾌할 정도로 투명하다. 뉴스를 단 하루만 보아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남을 희롱하는 이들이 수두룩하고, 단순 유희로 다른 이를 공격하는 일도 허다하다. 사회의 폭력은 모두의 일상에 깃들어있다. 고깃집에서 일하는 나의 친구는 매일 술을 따르라는 요청을 듣는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는 오늘도 손님이 던진 동전을 주웠다고 말하며, 학원에서 일하던 나는 남자아이들의 성희롱을 매번 견뎠다.


더 큰 차원에서도 보아도 자신의 기쁨을 위해 겁도 없이 타인의 희생을 바라는 사람이 불필요하게 많다. 소유를 위해 터전을 빼앗고, 우위를 차지하려고 자신이 아래인 척 몸을 구기기도 한다. 피라미드 맨 아래의 노동자들은 식사 시간을 보장해달라고 하는데, 기업은 배를 불릴 만큼 불려놓고도 앞으로도 네 몫까지 먹고 싶다며 귀를 막는다. 이상하리만치 악의가 분명한 인간의 비율이 많은 세상이다.


그런데도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가. 모든 인류를, 아무런 주저 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 인류는 자본주의를 이룩했고, 그걸 신처럼 숭배하고 있다. 어떤 시점 이후의 문명은 욕심에 불과함에도, 누군가는 더 대단한 문명이 있다고 믿고 선창하며 자신의 아래에 줄줄이 매달린 이들을 학대한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것 또한 인간이지만, 어떤 인간은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쉽게 스러지게 하기에 나는 사랑하는 이들만을 끌어안고 한껏 몸을 웅크렸다.


인류애를 잃은 채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일상을 함께 해야 하는 존재를 미워하길 염원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인류를 사랑하고 싶었다. 인류애를 가졌다고 확언하는 이를 만나면 아주 직설적으로 그 방법을 묻고자 했다.


“어떻게 인류애를 잃지 않을 수 있나요?”


지난 주말, 마침내 질문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간 인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답한 여러 사람을 스치며 오래 묵은 질문이었다. 비거니즘과 환경에 관한 강연이었다. 강연자로 나선 글 작가는 강연 도중 단 한 번도 인류애를 잃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말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몇 장 안 되는 프레젠테이션 자료에도 그 문장을 띄웠다.


그는 비건이 된, 그리고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오직 생명을 향한 죄책감만 내세우지 않았다. 과도하게 육식을 부추기는 사회가 된 건 과열된 자본주의 체계 때문임을 강조하고, 비건 지향인들에게 자본주의 공부를 권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손을 들고 묻고 싶었다. 방금까지 다양한 인류의 만행을 소개해주셨는데 어떻게 사회의 부조리함을 인지한 후에도 인류를 여전히 사랑하실 수 있나요. 궁금한 동시에 부러운 심정이었다.


질의응답 시간이 끝날 즈음 손을 들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는 많은 슬픈 일이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인류 전체를 미워한다고 말하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여럿 떠올라서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무언가를 위해 싸우는 작은 사람들이 얼마나 처절하고 위대하게 무언가를 해내는지 알기 때문에 인류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억을 되살린 문장입니다.


그의 말처럼 인류는 슬픈 일들의 근원이지만, 여러 위대한 일들의 주체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사랑하고, 불공정을 지나치지 않으며 짧은 삶을 바쳐 싸운다. 인권 담론의 수준은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이만큼이나마 그 수준이 높아진 건 누군가의 노고 덕이다. 이런 땀과 눈물의 역사에 섣불리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판단을 내린 일이 순식간에 부끄러워졌다.


앞으로도 인류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을 샅샅이 사랑하겠다겠다는 다짐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인류애를 잃었다는 말의 무책임함을 알게 된 이상 더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지 않으려 한다.


그동안 나는 미움을 말하는 나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불쾌한 마음을 주저 없이 내보이는 게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세상에 한 마디의 미운 마음을 더했다. 그러나 적대감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하며 부정적이고 무책임하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사랑과 미움 가운데 어떤 걸 발음할지, 이제는 확언할 수 있다.


“계속 사랑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강연장을 빠져나오며 그런 말을 전했다. 지금껏 나의 글이 미움으로 점철되지 않은 건 상당 부분 그의 글 덕이다. 그는 나와 비슷하게 세상을 순탄하게 바라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는 미움이 없다. 여러 책과 글을 거듭하며 그의 사랑은 더욱 명백하고 또렷해지고 있다. 감사를 담은 말을 건넸을 때,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의 착각이 아니라면, 그때 우리는 잠시 뭉클한 악수를 함께 했다.


세상이 어디로 향하든 우리는 언제나 인류애를 말해야 한다. 인류애를 끌어내리는 쪽보다는 끌어올리는 쪽과 부단히 시선을 맞춰야 한다. 앞으로의 인류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이제부터 힘겹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뱉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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