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현모 Oct 06. 2021

지극히 사적인 여름비의 낭만

비가 내리던 어느 여름

비가 온다. 여름비같지 않은 비다. 그리 많이 내리지 않아 봄비처럼 촉촉하기도 하고, 그래도 적잖게 내린다는 점에서 가을비처럼 추적추적 내리는 것 같기도 하다. 밤비다. 분홍색과 연보라색과 회색과 검은색을 섞어 놓은 듯한 오묘한 색깔의 하늘을 배경으로, 시각보다 청각을 자극하는 비가 촉촉하게 땅을 적신다.


비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비나 눈 혹은 그 어떤 자연현상이든 간에 나 자신은 쾌적한 실내에 머무르는 상태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정도. 딱 그 정도만을 좋아한다. 비를 맞으며 뛰어논다거나, 눈밭을 구른다거나 하는 직접적인 체험을 기꺼워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낭만을 추구하기에는 현실을 너무 많이 걱정하는 타입인지라 소설에 나올 법한 낭만적인 빗속에서의 추억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비 내리는 날이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사실 이렇게 거창하게 서두를 뗀 것치고는 별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였다. 아마 2학년 혹은 3학년이었던 어느 날. 매일같이 야간 자율학습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많이 왔다. 아마 여름이었으리라. 복도에 책상을 가지고 나가 공부하는 걸 좋아했던 나는 그날도 복도 창가를 마주한 채로 공부에 매진했다. 같은 학년 전체가 위치한 층 전체가 고요히 공부하고 있던 자율학습의 밤, 시간은 깊어 갔고 비는 하염없이 내렸다. 빗소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복도를 메웠다. 책에서 잠시 눈을 떼고 고개를 들면 창문에 맺힌 물기와, 공기를 가득 메우고 낙하하는 쉴 새 없는 빗방울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공부에 집중할 때면 빗소리가 asmr처럼 내 주변을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 소리와 함께 둘러싸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날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가 상당히 많이 왔기에 집에 갈 일도 걱정이었고, 분명 학교 건물을 나서서 집에 들어서기까지의 밤 하굣길은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 게 뻔했다.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꽤 좋았다. 보통은 그 순간이 지나야 만 알 수 있는 특정 시기의 안온함과 애틋함을, 그날만큼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나는 공부에 몰두하고, 비는 오롯이 내리고. 그 조화가 그날의 나에게 어렴풋하지만 색채 짙은 기억 하나를 남겨주었다. 그날 외에도 고등학교에 다닌 삼 년간 비가 온 날은 적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그날 내가 겪은 것에는 빗소리를 들으며 공부하는 경험뿐 아니라 우산을 쓰는데도 옷과 가방, 신발 여기저기를 적셔 가며 집에 가야 했던 불편한 경험도 있었을 테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남은 건 바로 그 순간, 복도의 책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또 빗소리를 들으며 공부에 전념했던 순간의 기억이다.


현실적으로 비는 마냥 반가워하기만은 어렵다. 대지에 수분을 공급해 주고 더위를 식히는 역할 등을 생각하면 그나마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상 비 오는 날이 즐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비 오는 날의 낭만적인 기억 하나가 나도 모르게 창밖을 보며 미소 짓게 만들기도 한다. 앞으로의 삶에서 더 많은 낭만이 나를 찾아오기를, 아니, 내가 더 많은 낭만을 찾아내어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전 08화 머릿속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