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콘텐츠에 취약한 편이다. 아니, 애초에 감각적 자극에 예민한 듯하다. 거기다 예측 불가능한 걸 싫어하는 성향이 더해지니 예상할 수 없는 화면이 몰아치는 영상물이 편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남들은 대체로 좋아하는데 나는 딱히...' 인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대표적인 게 영화랑 여행. 여행은 살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듯하지만, 영화는 참 쉽지 않다.
영화관에 간 횟수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다. 정기 결제해 이용하는 OTT 서비스도 없다. TV도 잘 안 본다. 예능도, 드라마도 관심이 없다. 유튜브는 보긴 보는데 진짜 철저하게 내 관심사 위주로 가끔, 보통은 아이돌 관련 영상 정도만 본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웹예능도 거의 안 보게 되더라. MZ세대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것들이 틱톡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거나 검색을 네이버나 구글이 아니라 유튜브에서 한다는 점이던데 나는 정반대다. 가급적 정보는 영상이 아닌 활자로 접하고 싶다. 영상도 차라리 자막이 있는 캡쳐 화면으로 보는 게 더 편하다.
숏폼에 익숙해져 긴 영상을 참고 볼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인...이라기엔 숏폼도 진짜 안 본다. 쇼츠나 릴스 등 각종 숏폼 영상을 정말 안 보는 편이라 장담할 수 있다. 중독은커녕 숏폼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한다. 이상하게 긴 영상보다 더 보기가 답답하다... 난 그냥 활자를 좋아하는 건가...
나도 나 자신이 신기했던 지점은, 소설과 영화로 대표되는 글과 영상에 대한 명확한 선호도 차이다. 지난해 추석 연휴 쯤이었던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몇 편을 본 적 있었는데 '이 사랑 이야기를 내가 소설로 접했더라면 훨씬 더 잘 몰입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 속에서 주어지는 힌트와 복선과 암시를 내가 잘 캐치하지 못하는 건지, 개연성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더라고. 무엇보다 영상물을 볼 때는 소위 말하는 '쫄리는 느낌'을 정말 싫어하고 또 못 본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작품에서 악당에 의해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는(도망치거나 함정에 빠지거나 역경을 겪는 등) 부분마저도 보는 걸 힘들어한다. 마음이 힘들다... 당연히 액션/스릴러/호러물은 절대 못 보고, 로맨스나 기타 장르는 안 본다.
반면 소설, 그러니까 글을 읽을 때는 다 괜찮다. 오히려 꽤 '쫄리거나' 잔인한 작품도 수용 가능하다. 실제로 넬레 노이하우스라는 독일 작가의 소설 '타우누스 시리즈'를 상당히 좋아한다. 아마 국내에서는 최근 드라마화되기도 한 4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가장 유명할 텐데, 나는 이 시리즈를 거의 다 읽었고(가장 최근의 것만 아직 안 읽었다) 그것도 여러 번 읽었다. 사실 이 시리즈는 세계관이나 인물이나 문체 등이 완벽하게 내 스타일이라거나, 공감할 구석이 많다거나, 남들에게 기꺼이 추천할 만하다거나 한 건 아니다. 그런데 그냥, 끌린다. 그래서 시리즈 전체를 여러 번 읽었다. 근데 상당히 충격적인 편이다. 사실 <해리 포터>도 죽음을 비롯해 여러 충격적인 요소들이 활용되는 이야기이긴 한데, 타우누스 시리즈는 전적으로 현실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더 적나라하게 충격적이다. 그런데도 술술 읽을 수 있다. 자꾸 손이 간다. 내가 타우누스 시리즈를 읽을 때 느끼는 즐거움은,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넷플 시리즈를 볼 때의 즐거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해도 영화와 같은 영상물은 제작자가 구현한 비주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반면, 활자로만 이루어진 책은 내 마음대로 상상할 여지가 있기에 충격이 완화되고 조절된다는 점에서 나의 이런 취향 차이가 나타나는 걸까.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냥 나는 영상이랑 상성이 안 맞는가 봐...하면 서 살 뿐ㅎㅎ
이전에 영화 <파묘>가 개봉했을 때에도 보고 싶었다. 근데 내가 못 볼 거 같더라...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간 게 (아이돌 콘서트 실황 중계나 다큐 상영을 제외하면)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에서 한 편의 영화를 제대로 감상한 기억이 나는 게... 2018년의 <국가부도의 날>이다. OTT가 더욱 우세해진 오늘날, 아마 내가 앞으로도 영화관에 갈 일은 거의 없지 않을까... <파묘>처럼 OTT로 한번쯤 봐볼까 싶은 작품들이 없는 건 아닌데, 나에게 있어서는 영상물보다 책의 매력이 더 크다. 영상 볼 시간에 책을 읽겠어... 안 그래도 읽을&읽고 싶은 책은 산더미고 시간이 없어서 문젠데!
아, 그리고 드라마도 잘 안 보긴 하는데. 지금까지 제대로 봤던 게 <괜찮아, 사랑이야>, <프로듀사>, <카이로스>... 그리고 더 생각 안 난다. 와, 괜사가 2014년이고 프로듀사가 2015년... 10년이나 지났다니... <카이로스>는 '쫄리는' 영상물치고 소재가 흥미로워서 그나마 잘 봤던 기억이 난다. 가장 마지막으로 보려던 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였는데 도중하차... 이 외에 드라마를 또 본 게 있나...? 아 <스카이캐슬> 일부 봤던 듯(아닌가...?). 진짜 나 드라마 안 보고 살았구나.
이거 쓰다 보니까 만약 내가 여느 사람들처럼 드라마를 비롯한 영상물 보는 걸 좋아했더라면 세상에 즐길 콘텐츠가 정말 많았겠구나 싶다. 근데 반대로 책도 사실상 무한히 존재해서 내가 죽기 전에 관심 있는 책을 전부 읽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내 스타일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취향이 좁게 뚜렷하다는 건 사실 마케터라는 진로 선택지를 고려할 때 분명 장점은 아닌데, 이대로 사는 나 자신이 만족스러워서 괜찮다.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기에도 삶은 짧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