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일상에서 손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걷기조차도 비오는 시애틀 겨울에는 사치일수도 있다. 날씨를 확인하고 비가 안온다 싶으면 하던 일을 멈추거나 짬을 내서 후다닥 다녀오기 일쑤였고 그렇지 않고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실내자전거나 스트레칭으로 대체를 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래도 한바퀴 걷거나 뛰면 찌뿌둥한 몸은 한결 더 편안해지고 삶의 활력을 주는 맛을 알게되니 비가 오더라도 자꾸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나보다. 추적추적 내리는 시애틀의 겨울비를 바라보면 그 날의 여운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나의 달리기에 관한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내가 태어났을때 사람들은 사실 오래 살지 못할꺼라 말했다. 살도 하나도 없이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진 신생아인 나와 첫 대면했던 이모는 엄마에게 '사람을 낳았니? 거미를 낳았니?' 하며 말씀하셨다니...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예측했고 그래서 엄마는 혹여나 잘못될까 잔병치레를 하며 골골하게 자라는 막내딸의 건강을 더더욱 신경쓰셨다.
나는 어릴적부터 소위 어른들이 말하는 몸이 가벼운 아이였다.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였고 또 반면 먹는 것에는 크게 관심도 없고 시도때도 없이 픽픽 쓰러졌던 그런 약골아이. 그나마 학창시절 축구선수와 농구선수로 활약했던 엄마아빠의 운동신경을 닮아 몸은 약했지만 다행히 운동신경이 있었고 그 덕에 오빠들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라 했다.
비록 약하게 태어나긴 했지만 단거리에는 뭐든 자신있었고 오래 달리기와 같은 장거리는 하긴 했어도 좀 벅차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빠는 평소에도 오빠와 나에게 100m달리기나 등산등으로 체력강화에 힘써주셨고 스타트가 빨랐던 나는 언제나 오빠보다 먼저 들어오려고 기를 쓰곤했다.
유치원 다녀오면 몸져 눕고 학교 조회시간에 픽픽 쓰러지고 체력장에서 오기로 달리던 그런 약골 아이는 매년 봄가을로 먹었던 한약 덕분인지 커갈수록 잔병치레가 없어졌고 점점 건강해져 갔다.
어느새 난 내 몸을 건강하게 다스리는건 물론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체력관리를 해주는 엄마 아내가 되어 있었다. 건강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고 공부하며 가족들의 근력과 유산소를 위한 운동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수분섭취와 단백질 칼슘 등 비타민 섭취를 잊지 않으며 건강의 초석이 되는 코어 근육을 만드는 것에 또한 많은 신경을 쓸수 있었다.
우리 부부의 운동신경을 닮아서인지 몸이 재빠르고 운동신경이 좋은 둘째는 달리기를 참 잘 했다. 봄에 하는 학교 달리기 행사에서도 언제나 자신의 양을 다 돌고도 친구들이 결승전에 들어올 때 까지 함께 뛰어주었지만 그녀는 특별히 지치는걸 모르는 에너자이저이다. 그런 그녀가 중학교에 가서 방과후크로스컨트리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였을테고. 그러나 달리기를 좋아하고 쉽게 지치지는 않았지만 체력이 좋은 백인아이들과 함께 뛰며 상위 클래스를 유지한다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였다.
그녀는 맨 앞에서 달리기하는 친구는 누구일까? 맨 앞에서 뛰면 어떤 기분일까 하며 그런것들이 궁금해서 더 열심히 뛰었다고 했다. 매일매일 달리기를 하며 그저 순위를 위해 친구를 앞서는 경쟁보다는 점점 자신의 기록을 갱신해 나가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달리기 시작했다. 가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시애틀에서 크로스컨트리를 하는 날에는 뛰고난 선수들의 몸에서 아지랭이가 나오는건 자연스러웠고, 비가와도 맑아도 그렇게 날씨에 상관없이 그녀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녀는 일상에서도 학교에서도 달리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커갔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는걸 자연스레 배워나갔다.
주재원에서 기러기라는 신분으로 탈바꿈한 작년 봄,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생활에 아직 익숙치 않았고 또 사춘기에 접어드는지 감정이 요동치는 둘째와의 좋은 추억을 쌓기위해 난 기꺼이 하프 마라톤을 신청했다. 일반 마라톤이라하면 몇시간씩 뛰어야하고 괜시리 겁부터 났겠지만 45분 안에 5k를 뛰는 건나또한 쉽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운동을 그리 즐기지 않던 큰애도 PE 수업시간은 물론 숙제로까지 3k~5k를 어렵지 않게 뛰는걸 지켜보았기에 큰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나의 계산착오였다는 걸 대회하는 날까지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5k를 41분에 완주 했다고 하면 그간 어떻게 준비했냐고 물어왔다. 준비? 준비를 해야하는거였구나... 뛰고나서야 난 정말 내가 달리는 것에 문외한이였다는걸 비로소 알게되었다. 변명을 하자면 평소 산책하는 거리가 5K쯤 된다. 그 거리를 1시간이 채 안되게 걷고 있으니 그저 뛰다보면 자연스레 45분안에는 들어오겠지라는 생각에 대회있는 그 날까지도 뛰는 연습은 전혀 않고 산책만 열심히 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망의 그 날
해도 뜨지않는 깜깜한 새벽을 가르며 분주하게 준비해서 나간 우리는 정말 많은 이들이 참가하는 그 뜨거운 열기에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의 열정에 감탄했다. 코로나 이후에 처음 개최하는 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듯 했다. 뛰기 전부터 모두들 흥분했고 열광했다. 나도 그런 에너지 속에 있어서인지 결승전을 돌아오는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뛰기도 전에 이미 상기되었다.
남녀노소 어린이 뿐만 아니라 노인분들까지도 유니폼을 입은채 대기하고 있었고 시작을 알리는 총성과 함께 우리는 그렇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처음부터 무조건 빨리 달리면 지칠꺼라는 그런 상식은 있었기에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달렸다. 그러나 옆에서 달리던 둘째는 이런 속도로 달리면 절대 45분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서 계속 잔소리를 해댔다. 처음 10분쯤 달렸을까 ' 왜 벌써 지치지? ' 할 정도로 숨이 가빴다. 힘들면 조금 빠른걸음으로 나름 쉼 하면서 페이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모습을 본 둘째는 여전히 날 이해하지 못한 채 엄청 답답해했고 계속 잔소리를 해댔다. 마치 열성 코치와 함께 뛰는 기분이랄까? 나는 앱으로 거리와 시간을 체크하면서 45분 안에 들어가서 메달을 따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평지는 그나마 나았다. 오르막길을 올라갈때는 정말 천천히 간다고는 했지만 다리가 꼬이는 듯 했다. 3K를 지나고나니 조금씩 지쳐가는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며칠전 위경련으로 컨디션이 덜 회복되었지만 포기하면 실망할 둘째를 위해서 그리고 메달을 딴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난 아마 진즉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둘째는 계속 달리면서도 제 페이스에 맞지 않는 엄마랑 안뛸꺼야 라고 말하기도하고 각자의 속도대로 따로 뛰면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나도 그녀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지만 5000여명이나 되는 인파속에 그녀를 혼자 뛰게 한다는 것이 와락 겁이 났기에 따로 뛰자는 말이 좀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뛰면 뛸수록 뛰는게 그리 만만한게 아니였구나를 자연스레 실감했고 그러다 결국 1k 남겨두고는 결승점에서 만나자면서 그녀를 보냈다. 기다린듯 내곁에서 쏜살같이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진즉에 보내줬어야 했나라는 후회와 아쉬움이 있었지만 사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혼자가 된 나는 막바지 젖먹던 힘을 냈다. 결승점에 가까워지니 사람들이 양쪽에 서서 응원을 해주고 있었고 그건 내게 또다른 힘을 주었다. 그 모습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금메달을 향해 달려가는 올림픽주자처럼 가슴도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기러기 생활을 하며 느꼈던 감정들이 물밀듯 밀려와 달리던 그 와중에도 눈물을 훔치며 결국 난 결승전에 도착했다.
41분이라는 기록으로 말이다. 그 때의 그 감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학교 체력장 이후 거의 처음 달린 경험. 어떤 운동이든 몸을 풀어주는 준비운동이 가장 중요한데 그런것도 생략한 채 참가한 용감한(?) 아줌마였지만 결국 난 해냈던 것 이였다. 딸은 엄마랑 뛰어서 기량을 발휘하지 못 했다며 사뭇 아쉬워하긴 했다. 그러나 느리게만 느껴졌고 답답하기까지 했던 엄마까지도 메달을 받으니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이번 경험은 내게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할 때마다 ' 그래도 내가 5k를 41분만에 완주한 사람인데..' 하며 은근히 시너지를 내주는 힘이 있었다.
그 날 받은 메달은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만끽하게 해줬다. 사춘기 딸과의 추억이 하나 더 생겨서 내게는 여느 금메달보다도 더 값진 것이였고 또 귀한 경험이였다. 올 봄에도 역시 벚꽃을 가르며 많은 이들이 달리겠지. 나도 다시 뛰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