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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샤 Jun 25. 2023

진주 목걸이를 한 할머니

반짝이는 햇살이 따사롭게 온몸을 감싸는 6월의 어느 일요일 오전, 빈 국립 음악협회 앞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숙녀들로 북적인다. 클래식의 명가이자 모차르트의 나라, 빈 필하모닉이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는 주중 주말할 것 없이 매일 연주회가 활발하게 열린다. 빈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세계 각국에서 연주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로 빈 국립 음악협회를 포함한 빈에 있는 여러 공연장들은 언제나 분주하다.


이 날도 어김없이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사하게 차려입은 채 연주회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서 클래식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두루 인기가 있지만 특히 나이가 지긋이 든 노년의 관람객들에게 유독 더 인기가 많은 편이다.

그들은 노년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6월의 녹음만큼이나 푸르고 화사하게 차려입은 채 들뜬 표정으로 빈 국립 음악협회 앞으로 모여들었다.

할아버지들은 하얗게 센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뒤로 넘겨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냈다. 깔끔하게 다려진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잘 닦은 구두로 격식을 차렸다. 양복 재킷에는 장식용 손수건인 포켓 스퀘어를 꽂아 멋을 더했고, 함께 온 여성을 부드러운 매너로 안내하며 신사의 모습을 뽐냈다.

한편, 남성복에 비해 다양한 여성복 덕분에 할머니들의 옷차림은 패션쇼를 방불케 할 만큼 근사하고 멋스러웠다. 화려한 패턴의 치마, 어깨를 드러낸 과감한 이브닝드레스, 심지어 점프슈트도 패셔너블하게 소화한 할머니도 있었다. 조금 느린 움직임이지만 꼿꼿한 자세로 하이힐을 신기도 했고, 새빨간 단화로 귀여운 포인트를 준 할머니도 있었다. 거동이 조금 불편해 보조 기구를 사용하여 천천히 걸으시던 할머니도 멋들어진 바지 정장 투피스를 입고 천천히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진주 목걸이로 포인트를 주어 음악회를 위한 패션을 완성했다.

연인과 함께 오기도 했고 친구와 함께 오기도 한 이들은 마르고 주름진 손으로 책자를 살피며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6월의 햇살 아래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하던 공연으로 두근거리던 내 마음은 오히려 눈앞에 반짝이는 어르신들의 열정과 환희에 압도되었다. 단지 예쁘고 화려한 옷을 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라서 보기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노년의 생동감 넘치는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오만한 생각인데, 나는 그동안 속으로 막연히 노년의 삶은 그저 따분하고 지루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늙은 나의 미래를 떠올렸을 때, 나는 좋아하는 것도 딱히 없을 거고 몸은 노쇠했을 것이고, 어떤 것에도 선명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길어진 24시간을 겨우 살아내며 살아지는 대로 살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하얗게 세어도, 걸음걸이가 느려져도 여전히 좋아하는 것이 있고 그 때문에 가슴이 뛰고,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는 설렘도 있는 것이었다. 여유로운 일요일 오전, 빈 국립 음악협회 앞에 모인 멋쟁이 어르신들은 이것을 몸소 보여줬다.


 ‘나이가 많아서’는 그저 노년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좋은 변명이었다.  

할머니가 되어도 좋아하는 것들이 있고 여전히 감각이 깨어있고, 아름다움을 열망할 수 있다. 또한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용기가 있고, 삶과 죽음을 함께 나눌 친구나 연인과 진하고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백발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처럼, 아니면 더 깊게 감정을 느끼고, 더 많은 것들을 감상할 수 있는 세월의 지혜까지 겸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노년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풍요로웠던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반짝여 보였던 것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감성과 삶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내가 그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함께 늙어가는 친구와 화려한 원피스에 힐을 신고서 좋아하는 공연을 보러 갈 것이다. 공연을 기다리며 친구와 일상을 나누고 시답지 않은 수다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할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에 벅찬 감동을 느끼며 연주회장 앞에서 당당하게 인증샷도 남길 것이다. 우아한 진주 목걸이를 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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