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안을 놓치지 않기까지의 시간
올해 초, 겨울. 이혼 뒤 내 몸은 오래 침묵했다. 생리는 거의 오지 않았고, 나는 ‘운동을 많이 해서 그렇겠지’ 하며 넘겼다. 편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었다. 신호를 듣지 않는 법을 익히는 중이었다.
어느 날 아주 작은 생각이 스쳤다. 혹시 병일까? 그 불안은 낮게 울리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산부인과로 향했다.
채혈 의자에 앉자 알코올 솜의 차가움이 피부에 번졌다. 간호사는 내 팔을 오래 살폈다.
“저쪽 팔도 한 번만요.”
검지가 팔 안쪽을 꾹꾹 눌렀다. 닦고, 또 닦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혈관이 잘 안 보이나요? 다른 분께 부탁해도 될까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익숙한 팔꿈치 안쪽이 아닌, 살이 도톰한 아래쪽으로 바늘이 들어왔다. 따끔- 그리고 금세 번지는 푸른 얼룩. 다른 간호사가 와서 익숙한 자리에서 단숨에 끝냈다. 검사는 끝났지만 팔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미세하게 저렸다.
예전의 나라면 ‘다 끝난 일’이라며 삼켰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옆에 있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왜 참아? 빨리 가서 말해.”
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원장에게 차분히 말했다.
“다른 분께 부탁드리자고 했지만 괜찮다고 하셨고, 이렇게 멍이 들었습니다.”
원장은 연신 사과하며 말했다.
“그럴 땐 바꾸는 게 맞습니다. 교육하겠습니다. 오늘은 상태 지켜보고, 내일 꼭 연락드릴게요.”
진심이든 절차든, 지금 여기에서 내 불안을 덜어주려는 태도면 충분했다.
접수 창구에 그 간호사가 서 있었다. 말할까, 하지 말까. 마음이 수십 번 오갔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오늘을 후회하겠지. 나는 다가가 낮게 말했다.
“제가 바꾸자고 했잖아요. 이게 뭐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새겨 듣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멍을 바라보았다. 군청색이 천천히 번져가는 작은 지도. 그 지도는 오늘 내가 어디서 멈췄고, 어디서 되돌아섰는지 기록하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불편함을 참는 사람이었다. 전남편의 외도를 알았을 때조차 혹시 내 탓인가를 먼저 떠올리던 사람. 이제는 달라졌다. 망설였지만, 결국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생리가 멈춰 있던 동안, 멈춰 있던 건 피만이 아니었다. 내 목소리도 멈춰 있었다.
상담실에서 상담선생님과 한 문장을 연습했다.
“불안해서 그런데, 바꿔 주세요.”
다음엔 그 말부터 제시간에 꺼내겠다.
아프고 속상하긴 했지만, 오늘 나는 나를 지키는 말을 했다.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내가 해야 할 말을.
작은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그 불안을 끝까지 지켜준 오늘의 나를, 나는 조용히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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