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 이 이야기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감성 소설입니다. Ludovico Einaudi – Experience 를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고, 천천히 감정을 따라가며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이상하다는 걸 먼저 알았다. 열이 있는 것도 같았고, 없는 것도 같았다. 분명 어제와 같은 방, 같은 침대였는데, 몸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보다, 이 상태로 움직이면 더 안 될 것 같다는 감각이 먼저 올라왔다. 책상 위에는 어제 그대로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고, 연필은 바닥에 떨어진 채였다. 그 풍경을 보는 순간, 나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문제를 몇 번이나 읽었지만 문장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숫자들은 서로 엉켜 흐려졌다. 집중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됐고, 억지로 하려고 해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아파도 했을 것이다. 몸살 기운이 있어도, 머리가 띵해도, 그건 핑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어젯밤에는 이상하게, 더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하는 순간, 무언가 정말로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숙제를 하지 않았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도 아니라, 멈춘 것에 가까웠다.
아침 식탁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 학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 숙제를 안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상태가 내일도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일도 아프면… 그럼 내일은 학원도 못 가겠지. 그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가슴이 조여 왔다. 학원을 하루 빠진다는 건, 내 일상에서는 거의 상상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 말을 부모님께 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 어려웠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일은, 늘 잘 해내던 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말하면 실망할 것 같았고, 괜히 걱정만 늘리는 건 아닐지, 내가 너무 약해진 건 아닐지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숟가락만 움직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나… 어제 숙제를 못 했어. 몸이 너무 힘들어서.”
그 말은 생각보다 작게 나왔고, 말하고 나서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모님의 반응을 바로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큰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오늘은 쉬어도 돼.”
그 말들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들렸다. 그제야 나는 숨을 한 번 깊게 내쉴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숙제를 하지 않았다.
학원은 갔다. 늘 가던 길, 늘 앉던 자리, 늘 같은 교실이었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고,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숙제를 안 했다는 사실이 수업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선생님이 숙제를 확인할 때, 나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오늘은 숙제를 못 했어요.”
말하는 순간 여전히 얼굴이 뜨거워졌고, 심장은 빨리 뛰었다. 그런데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 달랐다.
아무도 나를 크게 보지 않았고, 수업은 그대로 이어졌고, 교실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선생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수업을 들었다. 불편함은 남아 있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그 장면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몸은 조금 나아져 있었다.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었지만, 어제보다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학원에 갔다. 그런데 그날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완벽하지 않은 내가 불편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제의 기억이 조용히 나를 받치고 있었다. 힘들면 이렇게 해도 된다는 것, 멈춰도 세상이 그대로 있다는 것.
나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
아마 앞으로도 자주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티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가끔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람을 살게 한다는 걸.
그날 밤, 나는 문제집을 덮고 잠들었다.
모든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나 자신에게 처음으로 솔직해졌다.
그것이면,
그날의 나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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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틈, 아무 일도 없었기에>를 밀리의 서재에서도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닿는다면 따뜻한 밀어주기로 함께해 주세요 ^^ https://short.millie.co.kr/o73mpd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