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의 덫 (수빈의 이야기 1)

아무도 묻지 않는 마음

by 부엄쓰c

※ 이 이야기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감성 소설입니다. Ólafur Arnalds – "Only the Winds" 를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고, 천천히 감정을 따라가며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스탠드 불빛이 책상 위를 조용히 비추고 있다. 펼쳐진 문제집 위로 선명하게 새겨진 숫자들이 내 시선을 붙든다. 종이 위를 천천히 오가는 연필 끝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정답을 적었지만 쉽게 다음 문제로 넘어가지 못한다. 불안이 먼저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몇 번이고 답을 확인한다. 틀리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공포가, 늘 나를 이 책상 앞으로 끌어당긴다.


창밖을 바라보면, 어둠 속 아파트 창들이 희미한 불빛으로 빛난다. 모두가 여전히 깨어 있고, 나만 멈추면 바로 뒤처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방 안으로 흘러든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얼굴은 언제나 피곤하고 지쳐 있다. 웃음은 잠시뿐이고, 서로를 마주 볼 때면 예민한 긴장감이 조용히 지나간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이자 경쟁자였고, 누구도 먼저 속마음을 꺼내지 않는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책상 앞에 앉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학교 숙제, 학원 숙제, 다음 날을 위한 예습까지 완벽히 끝내지 않으면 방에서 나갈 수 없다. 하루라도 밀리면 다시 따라잡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나는 매일 밤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멈추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아 멈출 수 없었다. 몸은 이미 한계였지만, 더 무서운 건 마음이 먼저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방문 너머에서 흐르는 TV 소리와 부엌에서 들리는 엄마의 설거지 소리는 오히려 내 불안을 달래준다. 너무 조용해지면 견딜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혼자 남겨진 것처럼 불안이 천천히 숨통을 조여온다. 가슴 깊숙이 숨을 밀어 넣어 보지만, 공기는 끝까지 닿지 않고 얕은 숨만 맴돈다. 나는 다시 연필을 움켜쥐고 문제 위로 눈을 내린다.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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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짧고도 무거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도, 무엇이 깨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세상의 무게가 한 지점에 집중되어 눌린 듯한, 이상하게도 생생하고 또렷한 소리였다. 몸이 굳어 연필이 손끝에서 천천히 미끄러졌다.


거의 동시에 아래층 어디에선가 남자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악—!”


그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붙잡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을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이 내는 소리였다. 더 이상 단어가 아니라 소리로만 존재하는 비명. 그 절규는 몇 초를 채 이어가지 못하고 끊어졌다. 곧이어 아파트 전체가 깊은 침묵으로 돌아갔다. 방금 들린 절규보다 그 침묵이 훨씬 더 크고 무거웠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창문으로 가봐야 할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야 할지 생각만 맴돌았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자리에 붙들었다. 놀라면서도 너무 놀라지 않으려 애쓰는 내 모습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복도에서는 다급한 발소리와 낮은 목소리들이 오갔다. 엘리베이터 호출음이 빠르게 연이어 울렸다.


“119 불렀어요?”
“네, 지금 오고 있대요.”


희미한 흐느낌과 웅성거림이 복도를 채웠다. 그러나 누구도 크게 울거나 소리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모두가 익숙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기서는 비극조차 조용히 지나가야 하는 것 같았다. 이 아파트에서는 가끔 그런 이야기가 돌았다. 정확한 숫자는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해마다 한 명쯤은, 하는 말을 모두가 한 번쯤 들어봤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고, 곧 다른 이야기로 덮였다. 말하지 않는 것이 이곳의 규칙이었다.


방 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였다. 스탠드 불빛, 가지런히 놓인 연필, 펼쳐진 문제집까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지만, 이제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손끝은 차갑게 식었고, 나는 문제집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숫자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아이도 매일 이런 하루를 견뎠을 것이다. 숙제를 끝내고, 학원에 가고, 아프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실수하지 않으려 불안을 감추며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완벽함의 압박이 어느 순간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늘 해냈다. 그래서 아무도 묻지 않았다. 괜찮냐고, 힘들지는 않냐고. 잘하고 있다는 말이 오히려 끝까지 달리라는 명령 같았고, 그 말 뒤에서 나는 점점 숨 쉬는 법을 잃어가고 있었다.


연필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문제집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방은 여전히 조용했고,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직 어떤 답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벼랑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이 밤에 내가 느끼는 건 오직 무거운 침묵과 지독한 현실뿐이었다.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다시 조용해졌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이미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금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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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틈, 아무 일도 없었기에>를 밀리의 서재에서도 새롭게 연재합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과 밀어주기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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