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온도 17. 동일한 시공을 공유해도 느낌은 각기 다른 거예요.
진성은 아침 일찍 섬을 떠날 준비를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조심스레 씻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고양이 발걸음으로 걸었다. 의자에 앉아서도 조용히 명상하듯 있었다. 그런데 문이 열렸다.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잤어요. 모든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했어요. 섬에 와서 마음은 고요하고 평안한데, 몸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밤 고양이처럼 조용히 씻고 움직이세요?”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했죠.”
“어떻게 잠을 자요. 오래오래 기다렸던 사람과 신을 한자리에 벗어 놓았잖아요.”
“정성스럽게 신을 벗어놓아서 오래 기억될 겁니다.”
진성이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그건 나도 그래요.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동일한 시공을 공유해도 그 느낌은 각기 다른 거예요. 저는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서부터 여기까지 한 사람을 기다리며 살아왔어요.”
“그 아련한 기억의 저편이 무엇이죠?”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기억의 저편은 무의식 깊숙이 각인된 어떤 감정이나 간절한 소망 같은 거죠.”
배가 뭍으로 떠날 시간이 임박해오고 있었다. 진성은 그녀에게 말했다.
“먼저 가요. 푸근하게 쉬며 바람도 많이 쏘이세요.”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선생님, 오늘 출근하셨다가 저녁에 돌아오셔야 해요. 저는 여길 3박 4일 예약했어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진성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루를 넘기기도 힘들었어요. 두 사람의 남녀가 함께 폐쇄된 공간을 공유하면 본능이 작용하는 거 몰라요. 한 사람이 억제를 해야만 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또 다른 한 사람도 억제를 해야 했는지 모르잖아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동도 않고 빳빳하게 긴장한 상태로 밤을 지새웠어요. ”
“어제 술을 마실 때 계속 왜 술잔을 채운 거죠?”
“주량을 모르니까 그랬죠. 설마 돌아와서 말 한마디 없이 뻗어버릴 것을 상상했겠어요. 보통은 잠시라도 대화를 하거나 밤의 실루엣이라는 것이 비취잖아요.”
진성은 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이렇게 웃기죠. 내가 이렇게 실없이 자주 웃는 것이 이상해요.”
그녀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꼭 오실 거죠? 섬에서 육지 사람에게 버림받은 처녀처럼 슬퍼하긴 싫어요.”
“생각해 보고 내 심장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진성은 그렇게 말하고 하얀 펜션을 떠나왔다. 그녀는 창밖으로 가느다란 목을 내밀고 진성이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진성은 발걸음이 갑자기 족쇄가 채어진 듯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떠나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켜야 할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다. 아련한 기억의 저편이라는 것이 자신에게도 내재하는 것 같았다. 아직 특별한 감정은 피어나지 않은 평행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희미한 의식 저 너머의 자욱한 안개 사이에 그녀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