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온도 16. 저는 늑대는 좋아하고 전혀 불안감 같은 것은 없어요.
주변에 어둠의 자락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닷가 모래사장 위의 테이블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다는 푸르렀다가 검푸르지고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해가 지고 나서 바람은 더욱 살랑거리며 솔향기와 소금 내를 더하고 있었다. 멀리 하늘 위의 별빛이 바다 위로 떨어지고 파도소리가 은은하게 밀려왔다.
"이제 바닷가 모래사장 위를 좀 쏘다녀요. 수천 수알의 모래들이 밟히는 느낌이 참 좋잖아요."
그녀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는 진성과 나란히 걸었다. 이번에는 손을 잡지 않았다. 혹시 그녀가 불안할까 싶어 진성은 툭 던지듯 말했다.
“방이 2개라서 안심해도 돼요. 난 늑대본능은 없어요. 혹시 있는지도 몰라서 술을 많이 마셨어요. 술을 많이 마시면 저는 순한 양이 되고 죽은 듯이 자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저는 늑대는 좋아하고 전혀 불안감 같은 것은 없어요. 사람은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천성이 드러나잖아요. 선생님의 눈은 어딘지 깊고도 어렴풋한 슬픔이 배어 있어요. 자기 절제와 원칙이 매우 강하시잖아요.”
“또 통찰력이 발동된 건가요? 그래요. 그리 생각해 주고 섬에 같이 와줘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녀는 웃는 표정이었지만 약간 어두워지며 말했다.
“제가 더 감사하죠.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둘이 다녔더니, 치유가 되는 느낌이 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진성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서 말했다.
“왜 나한테 섬으로 놀러 가자고 말했어요. 나이차이도 많고 친구 하기에도 어중간한 것 같은데, 왜 그랬죠?”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요. 선생님 처음 만나기 전에 저는 한의원을 안 간다고 우겼어요. 생리통이 심하다는 것이 부끄러웠어요. 침 맞는 것이 무섭기도 해서 기분이 내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왔었죠?”
“엄마가 반드시 가야 한다고 했어요. 견인차에 끌려가는 자동차처럼 그렇게 간 거였어요. 덕분에 선생님은 엄마와 저를 가장 가까에서 함께 보고 대화를 나눈 유일한 남성이 된 거죠.”
“둘이 자주 같이 다니지 않았나요?”
“혼자 저를 키운다고 반찬가게를 했어요. 늘 김치 담그고 일하신다고 정신이 없었어요. 둘이서 다닌 것도 손에 꼽을 만큼이었어요. 부족함 없이 해주려고 했고 헌신적이었어요. 편안하게 쉬거나 함께 여행을 한 적이 없어요. 엄마는 섬으로 여행을 한번 가고 싶어 하셨지만 갑자기 그렇게 가신 거죠. 그런데 선생님과 함께 섬에 가면 위안이 될 것 같았어요. 선생님은 저희 모녀를 함께 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죠.”
“아. 이해가 되네요. 그런 깊은 의미가 있었군요.”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춘 듯 정지했다가 다시 말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어요. 저는 편의점에서 혹은 다른 곳 가깝게 혹은 먼발치에서 선생님을 가끔 보았어요. 제가 모자 쓰고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선생님은 저를 못 보셨을 거예요.”
“왜 아는 척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환자 중의 한 명이고 선생님 분위기가 약간 진지하고 무거워서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요. 선생님은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감탄사가 2개가 있는 경탄할 만한 이름이어서 기억해요. 오! 나의 태양, 아!! 내 사랑 이렇게 쓰이는 감탄사잖아요. 오!! 경 아!! 어찌 잊겠어요. 아주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름이죠.”
그녀는 표정이 밝아지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펜션으로 돌아올 때는 그녀가 운전을 했다. 그녀도 약간의 취기가 있었지만 진성은 거의 만취상태여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진성은 정신줄을 잡고 고꾸라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기가 오늘 신을 벗을 자리네요.”
“그래요. 오래오래 이 신을 벗은 자리를 기억하시면 좋겠어요. 저는 다른 남성과 신을 같이 한자리에 벗은 것이 처음이에요. 선생님과 신을 함께 벗고 나란히 놓아서 너무 좋아요.”
진성은 웃으며 맞장구치듯 말했다.
“저도 섬에 유배된 상태로 여성과 같은 자리에 신을 벗은 것은 처음입니다. 다른 의미의 첫날밤이죠.”
그들은 신을 벗고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술기운 탓인지 그녀와 함께 있는 공간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곳은 컴퓨터나 휴대폰, 전화벨 같은 것의 어수선함이 없는 공간이었다. 아늑한 느낌이 들며 또 다른 세상 바깥으로 나온 것 같았다.
진성은 습관처럼 잠시 어두운 창밖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지금 몹시 피곤해서 먼저 자려고 해요. 씻고 편안히 주무시면 됩니다.”
“그래요. 피곤하시면 먼저 주무세요.”
진성은 방으로 들어가자 말자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잠시 쉬었다가 그녀가 씻은 후에 샤워하고 잘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과음한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팽팽하게 긴장된 신경을 움켜쥐고 살았던 삶이 한꺼번에 느슨해지며 의식이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성은 순식간에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스르르 깊이 잠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