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적멸 12. 마음속에 작은 화염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풀어 내린 머리칼 사이로 얼굴선이 뚜렷했다. 눈과 코, 입술이 큼직한데도 얼굴은 갸름했다. 한참 후에 그녀가 뚜벅 말했다.
“사실은 저도 강승문 씨한테 눈이 저절로 간 적이 많아요.”
빈틈이 없어 보이는 그녀가 한 말치곤 믿기지 않는 폭탄이었다.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표정에 차가운 여자일 거라는 생각이 빗나갔다. 그녀는 쌍화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했다.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원리 아시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요. 과학적 원리가 남녀사이에도 작용을 하는군요.”
그녀는 승문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저를 그렇게 바라본 이유가 뭔가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면 좋겠어요.”
“이유 없이 눈이 저절로 돌아갔어요. 이유는 없어요. 마음속에 작은 화염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나요?”
“충분하지는 않지만 괜찮은 정도네요. 화염은 정염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마도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들은 마주 보며 웃었다. 그 말은 열정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둘은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승문은 그녀와의 만남 이후의 생각을 애써 차단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그 생각이 가장 중요했다. 승문은 노트를 꺼내서 할 목록을 적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청산거사는 내일 새벽에도 자기에게로 오라 했다. 무슨 인연으로 그와 이런 만남을 가졌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승문은 우선 생활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동굴 밖으로 나가서 물을 공급하는 샘을 찾았다. 다행히 근처의 작은 샘이 있었다. 그다음에는 화장실이 급선무였다. 화장실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근처의 작은 계곡 가까이에 해결하기로 했다.
살림살이 준비가 끝나자 다시 저녁이 되었다.
승문은 저녁 식사는 생쌀을 불려 먹기로 했다. 승문은 정리가 끝나자 동굴 밖 넙죽 바위에 앉아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펼쳐졌다.
산 위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장엄했다. 수많은 잎사귀들이 저녁노을의 붉은 기운을 받는 듯했다. 붉은빛이 서서히 으스름으로 산자락을 덮여가기 시작했다.
승문은 어두컴컴해진 뒤에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촛불을 켜고 앉아서 책을 펼쳤다. 도시생활과 달리 머리가 맑아서 책이 눈에 쏙 들어왔다. 완전하게 홀로 된 느낌이 특별하게 여겨졌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고 또 할 것도 없었다. 도시에서 타성은 사라지고 새로운 습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타성을 접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터였다.
승문은 느긋하게 홀로 있음의 고독과 적막감, 고요함을 느꼈다.
얼마 만에 느껴지는 쾌적함인가!!
승문은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을 대면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외부적 영향 없이 오로지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만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