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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Jul 03. 2022

편지가 왔어요~~~  

편지를 기다리는 시간들...

                  편지가 왔어요...  



  요즘 우리 집 우편함에 들어와 있는 편지들을 보면 대부분이 보험회사나 카드회사에서 온 안내용 편지들이다. 예전처럼 손으로 쓴, 아니 프린트라도 좋겠지만, 개인이 보내온 편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편지 쓰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 아니, 편지는 쓰고 있다. 'E-MAIL'라는 인터넷 편지를 쓴다. 나도 인터넷 편지를 가끔 쓴다. 핸드폰 문자 메시지는 이러한 인터넷 편지마저 구닥다리로 만들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누이는 당시 학생들에게 유행이었던 해외 펜팔을 하고 있었다. 우리 글이 아니라 영어로 편지를 썼으니 내 눈에는 정말 대단하게만 보였다. 해외 펜팔을 하지 못하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학생처럼 보일까 봐 너도 나도 편지를 쓰는 게 유행이었다. 영어실력도 쌓고, 외국 친구도 사귀는,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우편함에 들어있던 색다른 편지, 미국에서 온 편지. 내게는 참 신기하고 생소했다.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영어 편지를 척척 읽어 내려가는 누이가 대단해 보였다. 그런 부러움이 나도 외국 여학생과 펜팔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누이를 졸라 미국 할머니에게서 여학생을 소개받았다. 그녀는 할머니의 친척이라고 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누이로부터 넘겨받은 주소와 이름을 가지고 며칠 밤을 새워 편지 한 장을 겨우 완성했다. 


한두 줄짜리 영작문이 아니었으니 해외 펜팔 가이드 북에 나와 있는 예문들을 베끼고, 한영사전을 뒤져가며 나의 영어실력을 포장했다. 기왕이면 유식해 보이는 단어들을 찾고, 글씨체도 좀 품위 있게 쓰려고 잘 구부러지지도 않는 필기체를 쓰다가 몇 번씩이나 편지지를 찢기도 했다. 


에고, 이런 정성의 반 만 쏟았더라면 영어 시험은 백점은 문제없었을 텐데...


  생전 처음으로 쓴 영어편지를 들고 우체국으로 가는 내 마음은 들떠 있었다. 직원은 편지를 저울에 달더니 우표값을 계산해 주었다.  어린 학생인 내게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의 기다림은 시작되었다. 누이의 말대로라면 가는데 일주일, 오는 데 일주일 정도가 걸릴 거라고 했다. 2주일은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보름은 걸린다고. 하지만 보름은 내게 너무 길기만 했다. 


그런데, 2주일 만에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혹시 비행기가 편지를  싣고 가다가 태평양 바다에 빠뜨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주소를 잘못 적은 것은 아닐까? 편지를 너무 못 써서 답장을 해주지 않는 걸까? 매일같이 텅 빈 우편함만 쳐다보며 온갖 생각들을 해보았다. 거의 한 달이 지나 눈이 빠질 때쯤에서야  예쁜 글씨가 써진 편지를 받게 되었다.


  편지를 들고 있는 내 가슴은 설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뜯어본 편지. 동글동글하게 굴러가는 글씨들이 일단은 내 마음에 들었다. 내 영어실력이란 게 영어사전 없이 줄줄 읽어 내려갈 정도는 못 되었다. 두 장의 편지지 사이에서 컬러사진 한 장이 툭 흘러내렸다. 


사진 속의 소녀의 얼굴은 처음 만난 내가 반갑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내 또래 나이였지만 나보다 한층 성숙해 보였다. 소녀가 아니라 아가씨처럼 보였다. 텔레비전의 명화극장을 너무 많이 보아서 그런 걸까?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 줄리아 로버트,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동안 나는 외국 여자들은 다 그렇게 이쁘게 생긴 줄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사진 속의 여학생이 내 눈에는 별로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기대했던, 영화배우처럼 예쁜 외국 소녀가 아니었다. 남자들은 젊으나 늙으나 다 이쁜 여자들을 좋아한다. 나도 남자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나의 짧은 영어실력은 펜팔을 오래 끌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편지란 게 다분히 취미와 소질도 있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편지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영사전을 찾아가며 쓰는 것도 또한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답장하는 것에 부담도 느껴지고, 조금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흥미가 떨어지면서 편지 왕래가 뜸해져 갔다. 결국 어느 순간에 뚝 끊기고 말았다. 몇 년을 펜팔 하는 누이가 다시 한번 대단하게 보였다. 누이의 펜팔은 그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이후 나는 눈을 국내로 돌렸다. 당시는 요즘처럼 이성교제가 자유롭지가 않았다. 그래서 펜팔로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잡지책이나 노래책의 뒷장에는 '펜팔을 찾습니다'라는 광고란이 있었다. 거기에 나오는 여학생들의 이름은 하나같이 예쁘고 세련되었다. 한 마디로 촌스러운 이름은 없었다.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가명도 많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불확실한 것보다 좀 더 확실한 상대를 구하기 위해 잡지책에 나온 펜팔 주선 회사를 통해 여학생을 소개받았다. 물론 거액(?)의 소개료를 치르고서 말이다. 우리말로 편지 쓰기는 훨씬 쉬웠다. 해외 펜팔처럼 답장을 기다리는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편지를 주고받는 재미에 아무래도 공부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부모님이 아셨다면 큰일 날 일이었겠지만.


펜팔이란 편지로 친구를 사귀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펜팔을 할 때는 절대 상대의 사진을 주고받지 말라는 철칙을 깨고 내 사진을 보내주고 상대의 사진을 원했다. 사실 너무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어찌 생겼을까? 날씬할까? 얼굴은 예쁠까? 키는 얼마나 될까? 안경은 썼을까? 혼자서 상상해 왔던 얼굴은 공주나 배우처럼 아름다운 이상형일 게 뻔하기 때문에, 상대의 얼굴을 보면 거의 대부분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작은 흑백사진, 얼굴만 나와 있는 여학생의 사진을 내려다보고 역시나 나의 기대가 무너짐을 느꼈다. 뭐, 그렇다고 못 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어쩌면 나의 사진을 본 그녀도 실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발을 내밀면 두 발을 내밀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마음일까? 나는 직접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만나보기로 마음먹었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면서 나도 모르겠네 가슴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냥 편지만 주고받을 때는 별로 느껴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은근히 걱정도 되어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혹시나'의 기대는 '역시나'의 실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펜팔을 오래 하고 싶으면 상대를 직접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람들의 충고가 맞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으니...


  대학 시절, 아내를 만나 데이트할 때도 나는 많은 연애편지를 썼다. 군 복무할 때 만났지만, 복학하면서 우리는 먼 거리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취방에 개인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자연히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렇게 사랑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한 번씩 생각이 나는 편지가 있다. 그것은 필라델피아 전경이 그려진 그림엽서였다. 회사 다닐 때, 미국 출장을 갔다가 호텔 기념품 가게에서 산 그림엽서였는데,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다. 그런데, 그 엽서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배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수신 주소도 달라졌으니 받을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한창 연애시절에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 중에 '10년 후에 보내는 편지'라고 미래를 상상해 쓴 편지가 있었다. 그때는 영국 런던에 출장 가서 쓰는 편지라고 상상해서 썼는데... 그 편지가 생각나서 길지 않은 출장 기간이었지만, 일부러 그림엽서를 사서 그때의 편지처럼 써 보았던 것이었다. 그 편지가 제대로 배달되었더라면 과거의 상상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하필 그때 배달사고가 날 줄이야... 혹시 또 모르지. 죽기 전에 지구를 몇 바퀴 돌아다니다 정말로 영화처럼 배달이 될는지도...         


  아내는 삶이 힘들 때마다 연애시절에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꺼내 읽어보곤 한다. 물론 내게도 아내가 보내주었던 편지들이 있다. 수십 년이 지난 그 편지들을 읽어보면 손가락이 오그라들 정도로 낯 간지럽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지만, 저 때는 그래도 열정의 소유자였구나... 


  아내는 가끔 말하곤 한다. 만일 이 편지들이 없었다면 삶의 질곡을 지나오기가 더욱 힘들었을 거라고... 마음이 힘들 때 지난날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해내게 하는 기록들이기 때문이리라. 마치 타임캡슐의 뚜껑을 열어보듯이... 우리의 뇌는 모든 것을 기억할 만큼 그다지 용량이 크지도 않다. 결국 글로 쓴 기록이야말로 당시의 감정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주고, 현실의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게 해주는 거 같다. 아내에게 연애편지는 새로운 힘을 주는 강심제라 하겠다... 


  지금 글을 쓰는 것은 아마도 먼 훗날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순간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메신저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랬구나... 그때는 그런 마음이었구나... 바닷가에서 주운 병 속의 편지를  읽는 백발의 노인의, 엷은 미소를 띤, 주름진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오늘도 편지를 써서 병 속에 넣고 멀리 인터넷의 바다를 향해 던진다. 언젠가 내게 다시 돌아올 그날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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