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년 초라서 연희가 시간의 흐름을 깨닫지 못한 사이에, 여기저기 도로를 따라 존재감 없이 뼈다귀만 남아 있던 벚꽃 나무들이 제 계절을 맞아 신이 난 듯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금요일 오후, 평소 시내버스로 출퇴근하는 연희는 학교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서고 달리는 가운데 나무 사이로 작은 바람이 일렁이자, 연희의 발 앞에 꽃잎 하나가 떨어졌다.
'벌써?'
주중에는 학교일로 정신없었고, 주말에는 주말타임 일을 시작한 김여사와 교대하여 아버지 병원을 가던 생활이 시곗바늘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몇 주전, 술 취한 기준을 위해 그의 와이프를 만난 것 이후로는 그 어떤 주변인을 만난 적 없는 건조한 생활이 계속되는 나날들이었다.
무심히 바람결에 떨어진 꽃잎 하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대학 전공 시간에 배운 T.S. Eliot의 시, 황무지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그 첫 구절처럼, 연희 손톱만 한 꽃잎 하나가 연희 마음에 잠들어 있던 첫사랑의 그 고백, 그 추억을 일깨워 주었다.
"연희야, 너 그거 알아?"
얼굴은 연예인이라 생각될 정도로 잘 생겼지만, 늘 표정 없는 얼굴을 달고 다니는 과선배 기준이 전공수업 시작 전,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연희에게 다가와 수업 후에 잠깐 시간을 내어 달라고 부탁한 날이었다. 과동기들은 기준의 한마디에 놀라 수업 마치고 함께 걸어 나가는 기준과 연희를 흘끗거리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이야기들로 수군수군 과 분위기가 출렁거렸다.
교양강의동 건물에서 영국 현대시 수업을 들은 날이었고, 벚꽃이 만발해서 그렇게 둘은 휘황찬란하게 벚꽃으로 장식된 무대에 오르듯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뭘요?"
"나도 내 별명이 기가지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거든. 그 의미가 뭔지도 알고."
기준은 후배들의 무슨 부탁이든 척척 잘 들어주는 친절맨이지만, 표정이 없어 인공지능 로봇처럼 보인다 하여 기가지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아! 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연희는 기준 선배가 후배들이 부르는 별명을 알고 있다는 말에 자신이 지어 부르기라도 한 듯, 괜스레 미안하고 민망해서, 이 자리가 조금 불편해졌다.
"근데, 이상하게 너만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져. 뭔가 내 가슴 밑바닥부터 흐뭇함이 생겨."
"......"
아무 대답도 못했지만, 연희 가슴에 불편함과는 다른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자리가 주는 불편함에 약간의 흐뭇함과 설렘, 가슴 벅참이 동시에 올라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분명 기분 좋은 감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를 감추고 숨겨보려고 해도 안 돼. 오늘 너에게 말하지 않으면 더 이상 못 숨기고 주변에 들통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이대로 들통나는 것보다는 이렇게 고백하는 게 그래도 조금 더 멋져 보일 거 같아서..."
"......"
연희는 또다시 아무 말 못 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과동기들의 선망의 대상인 선배가 지금 자기에게 고백을 하는 거라니...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아니, 좋아해. 이런 감정은 살면서 정말 처음이야."
벚꽃 때문이었을까? 주변이 온통 핑크빛. 꽃잎이 흩날렸다.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기만 하던 기준의 얼굴에도 핑크빛 생기가 돌았다.
연희의 가슴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높낮이 없는 그의 고백이 멜로디 있는 아름다운 발라드처럼 들려왔다. 크게 숨을 들이쉬면, 그의 향기가 알코올이 든 술처럼 연희를 취하게 할 것만 같았다.
"내 마음으로는 당장 사귀자고 하고 싶지만, 너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네 마음이 준비되면, 나에게 말해 줄래, 너의 마음을?"
꿈을 꾸는 듯했다. 흩날리는 벚꽃 때문에, 고백하려고 완벽하게 준비된 무대 같아 보였다. 운명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날씨까지 도울 수없는 일이라 연희는 생각했다. 기준의 인기를 알기에 기준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으면서도 그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고백을 받으니 더 욕심나고 조바심도 났다. 고민하고 생각하고 밍기적거리면 이 순간을, 아니, 이 고백을, 누가 낚아채갈 것만 같아,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데도 그 자리서 바로 대답하고 말았다.
"저도 좋아요. 벚꽃 잎 날리는 이 날도. 이런 날벤치에선배와 단 둘이 나란히 앉아있는 것도. 이렇게 앉아서 선배의 고백을 듣는 것도... 모든 게 너무 완벽하네요. 그래서... 저도 좋아요. 정말, 좋아요."
말을 끝내며 수줍은 얼굴을 천천히 돌려 기준을 바라보자, 언제부터 연희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하얀 얼굴이 반달눈을 하며 방긋 웃고 있었다. 핑크빛 배경에 하얀 얼굴. 그 얼굴이 4월의 햇살에 빛나서 연희 한쪽 눈이 찡긋할 만큼 눈이 부셨다. 수줍은 핑크빛 고백이 눈이 부시던 그날.
오늘이 딱 그날 같았다.
학교와 집, 병원을 오가느라 잊고 있던 청춘의 날은 잔인하게 그렇게 깨어났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잊은 줄 알았던 그날의 그 시구절이 함께 떠올랐다.
4월은 이제 연희에게 가장 잔인한 달이 되었다.
죽어 있던 연희 마음에서 옛사랑의 고백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어, 잠들었던 연희의 첫사랑이 봄바람으로 깨어났다.
이제는 설레는 고백이 아니라 성급했던 선택으로 기억될 뿐인 그날이. 이제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미련을 덕지덕지 달고서 연희를 찾아와 조금은 추잡스럽게 보이기도, 단단하지 못해 조금은 안쓰럽기도 한 그 사람이. 그런 그 사람이 안쓰러워서 잊지 못하는 모질지 못한 자신이 함께 어우러져 4월이란 계절이 아프고 쓰게 느껴졌다. 가격을 당하기라도 한 듯 가슴 한켠이 쓰리고 고통스러웠다. 벚꽃이 만발한 이 아름다운 날에. 이 향기로운 4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