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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블라썸 Apr 29. 2023

달빛이 고와서, 벚꽃이 고와서...

#16. 토요일, 저녁 7시

토요일 저녁 6시.

김여사가 편한 복장차림으로 다급히 병실로 들어섰다.


"연희야, 나 왔어. 얼른, 바람이라도 좀 쐬고 집에 가서 쉬어."


"뭐 하러, 일찍 왔어? 낼 아침부터 또 일 나갈 거면서."


"얘는. 지금 바깥이 얼마나 이쁜 줄 알어?"


김여사는 연희가 봄날의 정취도 못 느끼는 무감한 청춘이 될까 봐 그게 안타까웠다.


"나가서 벚꽃 구경이라도 좀 해. 날이 폭하니, 너무 이쁘게 폈더라. 이번 주말 지나면, 그 꽃도 곧 질 거 같아."


김여사의 끈질긴 성화에, 연희는 병실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벚꽃이라면, 출퇴근 길에 실컷 보는 데 그걸 모르는 김여사에게 거절을 못했다. 벚꽃이 아름답기만 한 사람은 모를 그 마음이라서...


연희는 집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모교로 향했다. 오랜만에 산책으로 몸에 밴 병원 공기를 깨끗이 씻어내고 싶었다.


한편, 선우도 봄날씨에 못 이겨 모교를 방문했다. 연희가 말했던 그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를 보고 싶었다.


겨울에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빛깔의 공원이 마치, 다른 공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연희가 앉아있던 그 벤치에 앉아서 그녀가 이 장소를 좋아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비록, 겨울 이후로 연희의 소식은 전혀 모르지만, 추억이 깃든 벤치에 앉아서 보는 벚꽃은 연희가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어슴푸레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저녁 7시.

선우는 처량하게 혼자 벤치에 앉아서 벚꽃의 핑크빛과 그라데이션을 이루는 붉은 하늘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그때, 실루엣이 가는 검은 그림자가 선우의 시야를 가렸다. 자연스레 시선을 아래에서 로 훑었다. 영락없는 연희였다.


환상일까 봐 선우는 살짝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찌릿 통증이 전해졌다. 항상 제 멋대로 아찔하게 다가왔다가 밉살맞도록 쌀쌀하게 연락을 뚝 끊어버리는 그녀. 연희가 확실했다.


오늘도 연희는 그렇게 말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선우 옆에 앉았다. 자기를 하나도 존중해주지 않는 것 같은 연희가 미워야 되는 데, 전혀 밉지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에 이렇게 자기 옆에 앉아주어서 오히려 고마웠다.


"잘 지냈어..요?"


다시 말을 높였다. 둘 사이에 어색해진 거리가 확연히 느껴졌다.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닌 데, 오히려 연희가 웃었다.


"다시, 말을 높이네..요?"


연희는 질문에 대답은 앉고 딴소리로 어색함을 무마하려 했다. 아니, 선우의 잘 지냈냐는 안부 한마디에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드문드문 보니까, 쉽지 않네."


선우가 어색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다시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는 듯 말을 놓았다.


"친구가 될 듯 말 듯 한가 봐?"


"어. 될 듯 말 듯 해... 근데, 오랜만에 여기 왔어?"


"어. 요즘 주말마다 일이 있어서..."


연희는 자신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가 서글퍼서, 에둘러 표현했다.


"좋은 사람이라도 생겼나 봐?"


일이 있다는 연희의 말에 선우는 살짝 긴장했다. 연희의 대답을 기다리는 데, 연희는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없어, 선우의 한동안 평온했던 마음에 다시 애가 끓었다. 몇 번이고 그녀가 자신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것 같다고 마음을 다독이다가도 그녀를 한 번씩 만나고 오는 날이면, 달콤한 입맞춤 때문인지 희망이 생기곤 했었다.


불면 날아갈까, 잡으면 터질까 겁이 나서 연희의 솔직한 마음도 물어보지 못한 채, 둘이 처음 만난 지도 어느 듯 꽤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선우 주변에서는 왜 소개하나 안 받냐고 난리인데, 그런 자신을 몰라주는 연희가 야속할 뿐이었다. 자신의 학교라도, 아니, 자신이 속한 모든 모임에 다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의 인기를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재촉하고 강요한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선우였다. 자신도 자기 마음을 어쩌지 못하여 아직도 연희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미 첫 만남 후에, 아니, 두 번째 만남에, 것도 아니면, 세 번째 만남, 네 번째 만남이라도 충분히 거절하면 될 일이었는 데, 선우는 연희를 거절하지 못했다. 오히려, 오늘처럼 우연히 마주치길 고대했었다. 그냥, 이렇게 마주치기만 해도 행복하니까...


"선우, 넌, 뭐 좋은 일 없었어?"


연희는 선우가 야속해하는 마음도 모른 채, 야속한 질문을 했다.


"좋은 일? 지금 이 순간?"


"뭐래? 그거 작업용 멘트야? 안 본새, 조금 느끼해졌네. 하하하"


이번엔 연희가 큰소리로 웃었다. 자신의 진실이 이렇게 연희의 웃음거리가 된 게 멋쩍은 선우는 연희처럼 큰소리로 웃지 못했다. 가로등불처럼 우두커니 두 사람 뒤에 서있는 벚꽃나무. 그 나무가 환하게 스포트라이트처럼 두 사람만을 밝혀 깜깜한 이 밤에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추억과 욕망이 뒤섞인 이 벤치를 무대로 만들어주었다.


"진심인데... 여기서, 너와 사계절을 다 느껴보고 싶어."


얼굴을 활짝 펴서 웃고 있는 연희와 달리, 선우는 사뭇 진지하게 말을 던졌다.


"느끼고 싶다고? 하하. 진짜 느끼게 해 줄까?"


연희가 자꾸 장난처럼 받아들이는 게 얄미울 정도였다. 선우는 약간 삐친 듯 시무룩하게 정면 하늘을 쳐다봤다. 핑크빛이 도는 보름달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연희와 눈이 마주치고, 마음이 마주쳐야 하는 데...


한참을 웃다가 혼자만 웃고 있는 것을 느낀 연희는 선우 볼에 가벼운 뽀뽀를 했다. 따뜻한 입김에 놀란 선우가 고개를 돌려 연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연희가 미안함을 담아 달빛처럼 은은하게 다시 선우에게 다가왔다. 이 행위가 위로가 된다는 연희의 말에 처음으로 동감했다. 선우의 서늘한 토라짐에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하던 마음이 이렇게 스르르 눈 녹듯 용서가 되었다.  


은은한 달빛이 고와서, 얄미운 사람도 미워할 수 없는 밤.

벚꽃의 핑크빛이 고와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밤.

선우는 연희와 함께 추억과 욕망이 뒤섞인 벤치에서 한껏 봄을 느꼈다. 더 진한 향기의 봄을, 더 짙은 추억이 될 봄을, 더 선명한 욕망으로 채색되는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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