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저녁 6시쯤 되어, 제법 연희 과동기들과 선배들이 모인 자리. 그 무리들 중 누군가가 외마디 탄성을 뱉었다. 오랜만에 한자리하게 된 연희의 같은 과 선후배와 동기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다정한 안부가 오가고 있을 때였다.
일제히, 모두의 시선이 소리를 낸 사람의 시선을 따라 장례식장 입구로 쏠렸다. 훤칠한 키의 하얀 얼굴이 검정 슈트와 제법 잘 어울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연예인 포스의 남자와 그 못지않게 큰 키에 이목구비가 시원스러운 미인형 얼굴의 여자가 조심스레 신발을 벗으며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이 조문하러 들어가자, 식당 내 연희 과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낮은 목소리로 작은 동요가 일었다. 기준이 연희에게 고백하던 날처럼, 과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술렁거리는 분위기였다.
조문을 하고 두 사람이 나오자, 술렁거리던 분위기는 금세 촤악 가라앉았다. 서로 눈빛만 주고받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 분위기만으로도 선우는 직감했다. 저 남자가 연희의 전남친, 기준이라는 것을. 근데, 여기에 왜 부인과 같이 왔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민아도 못마땅한지 나지막하게 한 소리했다.
"어휴, 정말. 마마보이 아니랄까 봐... 이젠, 와이프 없이 혼자 못 다니나 보다. 어휴..."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며, 민아에게 조용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그 순간, 그 커플이 선우, 민아의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기야, 자기 후배라고 했지?"
"어."
기준이 아내에게 대답하는 표정까지 다 느껴질 정도로 둘의 대화가 선우와 민아에게 가감 없이 선명하게 들렸다.
"근데,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란 말야? 결혼식서 봤나?
"그랬겠지. 그렇게 눈썰미가 좋았어?"
"그러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어디서 봤더라..."
기준의 아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식탁 위에 식사가 차려졌다. 기준은 주변의 동기들과 후배들을 둘러보며 눈빛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눈빛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밥, 국, 수육, 무침회, 전 몇 가지와 몇몇 안주거리, 술과 음료가 모두 세팅되고, 기준이 밥을 한 술 떠서 입에 넣으려던 찰나였다.
"아! 생각났다."
그 말에 기준은 뜨던 밥술을 멈칫했다. 그다음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옆테이블에서 조용히 밥을 먹고 있던 민아와 선우마저도 긴장해서 젓가락질하던 손들이 멈췄다.
"자기 술 취하면 찾아가던 그 집 여자네. 자기야, 뭐야? 정말 단순히 후배 맞아?"
기준 아내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며, 점점 격앙되었다. 주변에 앉아있던 과사람들도 드뎌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기준을 흘깃했다.
"갑자기, 왜 그래? 목소리 낮춰. 있다가 집에 가면 내가 다 설명해 줄께."
"있다가는 무슨 있다가야? 지금 당장 일어 서! 지금 당장 나가자고."
기준의 아내가 식탁을 탁 치며 일어났다. 장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기준과 그 아내에게로 쏠렸다. 주변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지 기준이 목소릴 낮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단, 여기 차려진 것은 다 먹고 일어나야 되지 않겠어?"
"아니! 그럴 기분 아니거든? 얼른, 당장 나와. 일 더 키우지 말고."
멀끔히 잘생긴 얼굴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것처럼, 아내의 행동을 제어할 설득력 있는 표정하나 짓지 못하고 그녀의 고압적인 태도에 그대로 끌려 나갔다. 끌려 나가는 기준의 뒷모습 뒤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혀를 차는 듯한 표정이 지어졌다.
방금 식사하러 자리 잡은 기준이 그녀와 바로 일어서서 신발을 신는 모습을 보자, 동기들 테이블을 돌며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던 연희도 당황한 듯 빠른 걸음으로 배웅 인사를 하러 신발장 앞으로 따라나섰다.
"나, 당신 누군지 기억났어요. 그러니, 인사 따윈 하지 말아요. 그 인사 안 받고 싶어요. 그리고, 절대로 다시 연락하지 마세요."
"아, 진짜, 나 부끄럽게 왜 이래?"
연희의 눈은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허공을 헤맸다. 손도 어디 둘 지 몰라 허리춤쯤에서 안절부절 두 손을 모았다 풀었다 했다. 당황한 연희를 바라보며 기준이 역정을 냈다. 그러면서, 빨리 나가자는 듯이 아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그 손을 홱 뿌리치며, 당당하게 혼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미안해, 정말... 이럴려고 온 게 아닌데..."
어색한 사과를 남기고, 기준도 재빨리 그녀를 뒤따라 나섰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에 연희는 마치 자신이 먼저 헤어진 남친에게 치근덕거린 여자가 된 느낌이 들어 무척 속이 상하고 억울했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서 멍하니 멀어지는 기준에게서 등을 돌려 한숨을 쉬며 조용히 빈소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과 사람들 사이가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연희가 미련을 가지고 다시 연락이라도 한 게 아니냐는 추측성 발언이 난무했다. 정확하고도 자세한 이야기를 선우조차 모르지만, 사람들이 연희를 비난하는 듯한 말에 속이 상했다. 민아도 속이 상한지 주변을 수습하고 싶은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같은 과 생활하고도 몰라요? 연희 언니가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거? 그 남자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진짜 몰라서들 그러는 거예요?"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민아는 먹던 밥술을 놓고 연희에게로 달려갔다. 민아의 말로 인해, 연희가 그럴 리 없다는 결론으로 다시 장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러자 이제는 두 사람이 왜 결혼하지 않았냐는 둥, 참 안타깝다는 둥, 이제 기준은 어찌 되냐는 둥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지, 그냥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하나 생긴 건지 진심을 알 수 없는 말들이 오갔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주제가 되어야 할 장소에서 온통 연희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만이 난무한 장례식장. 연희에게는 죽은 자와의 이별도, 산 자와의 이별도 힘겨운 하루가 지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