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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도연 Apr 07. 2021

'맛'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매일 부패와 끝없이 싸워야 살아남는다

응급 호출이다. 냉장실 공기가 무겁다. 양파에 싹이, 버섯과 마늘에 곰팡이가 오르기 시작했다. 스테이크 상비군 부챗살의 호흡은 가늘어졌다. 수술이 시급하다. 농가가 애써 길러준 녀석들에게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지’ 묘비명 따위 줄 수 없다.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장비를 도열한다.  

양파, 마늘, 당근, 버섯, 땡를 다져 혈색이 돌 때까지 볶는다. 다음은 부챗살을 레어로 데쳐 심폐 소생 후 썩둑썩둑 썰고, 돼지 뒷다리 다짐육과 함께 채소 위에 뿌린다. 잠시 푸닥거리를 하다 두부, 마파소스와 두반장, 케첩 한 큰술의 세례를 준 후 물이 적당히 날아갈 때까지 졸인다. 푸욱푸욱. 마음도 졸인다. 푸욱푸욱. 팬뚜껑이 심장처럼 들썩인다. 십 분 후. 간을 보고 조심스럽게 돌아선다. OK. 휴스턴 관제탑도 일제히 환호한다. 맛이 갈 뻔한 아이들은 무사히 마파두부의 세계로 타임슬립했다.

통상 ‘맛이 간다’는 건 어딘가 망가진 사람, 사물, 사상을 일컫는다. 본연의 생명력을 잃고 부패하는 거다. 하지만 사실 부패는 태초부터 인류의 첫 번째 생존조건이었다. 사람은 늙고, 사물은 썩고, 사상은 게끔 설계됐다. 세계는 맛이 가야 정상이다. 맛이 비정상이다.

그러니까 맛은 동사다. 비정상에서 정상을 건져 올리는 행위. 부패하는 세계에서 멈추지 말아야 살아남는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천국에 가야 한다고 믿는다. 요리는 인간이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 중 하나다. 맛이 간 인간은 대개 해치는 일이 많다. 손과 발과 혀와 눈으로, 무언가를 뽑고 밟고 찢고 태운다. 와중에 같은 사지로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밥 짓는 일이란 보기 드문 숭고한 공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정성이 다 통하진 않는다. 혀를 기쁘게 하기도 쉽지 않고, 몸 마디마디에 생기를 불어넣는 진짜 맛, 을 내기란 더욱 어렵다. 오죽하면 요식업에 필요한 건 실력이 아니라, 미원을 많이 넣을 수 있는 용기란 농까지 있다. (농이 아니던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던 예수는 혹시 밥을 태운 식사 당번을 타박한 건 아니었을까. 지난한 허탕 끝에 숨겨진 맛에 이른 이는 천국행 티켓을 거머쥐어 마땅하다.

음식뿐만 아니다. 좋은 재료를 어르고 달래 키우고, 게 손질해 깊은 맛을 우려내는 일은 말(言)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말을 뱉지만 개중에 오감을 살리는 맛을 찾기란 쉽지 않다. 어렵게 건진대도 통 장사가 되지 않니 말의 유통질서가 개선될 여지는 아득하다. 말의 형편이 이러니 말을 통해 도는 생각에도 맛이 깃들 여유가 없다. 맛의 가치를 놓친 세계는 다시 계속 맛이 가 버리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맛집에 열광하는 건 어쩌면 점점 맛을 찾기 어려운 세계를 잠시 잊고 싶어서인 줄도 모른다. 잘 지어진 밥 한술을 면서 잃어버린 세계의 맛을 추억하는 건지도.


다행히도 틈틈이 맛의 생존 소식을 접한다. 유서를 써두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소방관에게서, 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손길에서, 떨어트린 지갑을 주워 다급히 뛰어오는 발길에서, 네가 거기 있어줘서 참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서. 그렇게 누군가의 맛과 노력에 감사하고, 누군가를 위해 맛 내는 일에 보다 시간을 쏟는다면, 부러 맛집을 찾지 않아도, 언젠가 맛있는 세계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안다. 쉽게 찾아지면 그게 또 어디 맛인가. 예수의 식사 당번처럼 천국에 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삶 곳곳에서 맛을 찾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면, 적어도 어제보다 조금은 멋있는 세계라도 될 일이겠지. 나를 키워준 맛,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갚을 수 있겠지. 맛은 동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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