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도연 Apr 09. 2021

카라마조프도 행복할 수 있을까

아직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그 안에 있다

고2 늦가을, 미술을 포기하고 다시 입시에 떠밀려 도서관 야간 자율학습에 수감됐다. 펜 구르는 소리가 귀뚜라미 울음을 대신하고, 선생들은 꿀 떨어지는 눈길로 학생들을 지켰다. 그렇다고 심란한 정신머리까지 가둘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낮은 포복으로 감시를 피해 미적분 너머 카라마조프가의 기록 얼굴을 파묻었다.


당시 서울고 도서관 2층 열람실에는 1970년대 정음사가 중판한 세계문학전집 양장본이 있었다. 세로 쓰기에다 글씨는 잘고 또 한자는 왜 그리 많은지 당연히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덕분에 그 까슬까슬 낡은 녹색 커버를 열면 은 밤 남몰래 고분벽화를 도굴하는 듯한 흥분기도 했다. 지금은 찾기 힘든 유물이다. 국회도서관에 있는 걸 확인했지만 몇 달째 휴관이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선 디지털로만  수 있다.


처음 이 암거래에 빠져든 건 순전히 알료샤 때문이다. 취한 광대 같은 아버지 표르와 형들의 반목 가운데, 수도원의 순진하고 정 많은 알료샤는 엇비슷한 환경의 내가 몰입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그와 함께 떨고 고민하면서 어느덧 나는 카라마조프형제가 됐다. 그렇게 스스로 순수함의 중심에 서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적어도 표르를 아버지처럼 증오했고, 드미트리의 왜곡된 남성성을 경멸했고, 이반의 싸늘함에 질렸으니까.


착각이란 이런 거다. 자신을 잘 안다 확신하면 언젠가 자신을 비롯한 모든 현상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 나는 결코 알료샤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알료샤이면서 또한 표르, 혹은 형들이기도 했음을, 세월은 내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어쩌면 카라마조프가의 인물들은 모두 서로 다른 시간 선상에 선 동일인물인지도 모른다. 순수하고 신을 경외하는 따뜻한 가슴의 알료샤, 그는 세월이 흐르며 신에 회의를 품고 냉소적인 이성주의자 이반으로 바뀌고, 경거망동하는 아버지를 미적분하게 될 거다. 또 자신의 주인인 줄 알았던 이성이 실은 그저 어느 구석진 자리 세입자 신세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언젠가 깨닫고는, 눈물 흘리며 술독에 빠져 드미트리로 빙의한다. 훗날 아들들이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며 자라고, 결국 살해당하는 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알료샤를 통해 어떤 희망을 남겨두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빛나는 순수함도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물론 벤자민 버튼처럼 시간이 거꾸로 흘러 표르가 알료샤로 역변하는 시나리오도 가능은 하다. 아주 고된 수행이 필요하겠지만.


세월과 유전자의 굴레에 체념하는 건 아니다. 고교 시절의 카라마조프가 충격과 격정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어떻게 보복당하지 않고 카라마조프 조직에서 무사히 할 수 있을까 궁리하게 만든다.


비단 가족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증오해 마지않던 부류의 인간, 직급, 조직, 정치, 예술, 욕망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도망쳤나, 증오 자체로부터는 또 얼마나 자유로워졌나 확인하게 되는 거다. 시간의 테스트에서 과연 나는 몇 점을 기록했을까. 돌이켜 보건대 썩 좋은 성적 같지는 않다.


다만 희망적인 건 아직 시간 흐르고, 그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낙제점을 받았어도 테스트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떨어지면 다시, 떨어지면 다시. 멈추지만 않는다면, 바뀔 여지남는다.


고2 늦가을 어느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시작된 모종의 암거래가 어떤 결말에 이를지 지금도 책장을 넘기고 있다. 카라마조프도, 나도, 당신들도, 한 번 행복해 보자.


이전 21화 빈 캔버스를 채운다는 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