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연기처럼 가벼운 우리들
내 몸 사용법을 다시 배우는 중이다. 하루 한 끼만 먹고, 두 시간 이상 걷는다. 그리고 금연, 오늘로 50일째. 스스로 잘 안다 생각했는데, 지금껏 알던 내 몸이 아니다. 그리 많이 먹지 않아도, 전보다 많이 움직이는 데 충분한 열량이더라. 19년 피운 담배가 없어도, 꽤 버티더라. 가끔 담배 생각이 뺨을 후려치지만, 숭늉 같은 매머드커피 아아 대짜를 들고 마냥 걷다 보면 좀 진정된다.
빨대를 빠는 행위가 흡연 욕구를 잠재우는지도 모르겠다. 애초 담배를 빤다는 건 구강기 고착 증상이었던 걸까. 실제 엄마 젖을 못 먹고 자랐고, 지금도 구강기 고착의 폐해를 죄다 달고 사는 인간에 가까우니까. 그럼 금연에 성공하면 과연 구강기를 넘어서 조금은 어른스러워질 수 있는 걸까. 물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근대 학계에서 쫓겨난 뒷방 개소리란 소리도 있더라만.
무튼 담배 없이 정처 없이 하염없이 길을 걷노라면 다른 세계에 닿는 기분이다. 커피와 함께 일종의 러너스 하이가 혈관 마디마디를 타고 흐르며 전신에 잔잔한 즐거움을 전하고, 차를 타고 무심코 지나치던 거리, 담배 빨 구석만 살피던 음침한 골목 곳곳이, 모두 처음 보는 풍경이 되어 망막을 채운다. 가까이 보아야 예쁘다더니, 가보지 않은 길의 숨은 표정을 발견하는 게 반갑다.
요즘은 신촌이다. 오거리에서 싸구려 커피를 챙겨 걷기 시작한다. 화려한 술집들 너머 창천동 골목의 오래된 이야기들 사이를 기웃거리다 동교동, 연남동으로 넘어간다. 마포세무서에서부터 경의선 숲길을 타도 좋다. 서강대까지는 호젓한 동네 뒷길 같아서 숨통이 트이고, 와우교 구간은 간이역과 철도 건널목, 책거리가 몰려 있어 연남동 쪽보다 좀더 아기자기한 정취가 있다.
그리고 연희동을 만난다. 이름이 어쩜 연희야. 연희김밥, 카페연희, 연희공방, 그저 동네 이름만 붙여도 힙한 상호다. 연남이 시크한 단발에 중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동생 같다면, 연희는 곱게 땋은 긴 머리를 쓸어내리며 문틈으로 고개만 내미는 조신한 언니 같다. 그런 동네다. 반면 창천은 신세계 골드문 화교 라인 행동대장 이름 같지 않냐고, 연희를 시샘하며 홍제천까지 걷는다. 평온해 보인다.
그러나 실은 불안 위를 걷는다. 유혹을 피하려 걷고, 불안을 외면하려 걷는다. 나만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계속 걷는다. 멈춘다는 불안에 쫓겨, 걷는다는 환각을 좇는다. 이래서야 예전과 다를 게 없다. 아니, 오히려 통장 잔고는 점점 줄고, 시간은 목을 바짝 죈다. 내가 쥐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담배 연기보다 빠르게 사라진다. 어쩌면 난 지금, 금연이 아니라, 절연 중이다.
금세 손에 잡을 거라 여겼던 일은 막연하다. 뿌연 연기 너머 반짝이는 게 별인지 위성인지, 추락하는 여객기 조명인지 알 수 없다. 자존감이 웃통을 까고 바닥에 드러눕는다. 머리를 긁적이며 물어본다. 내가, 뭐라고, 했지? 오징어게임처럼 확실한 대전 상대도 없다. 기다려야 할까, 다가서야 할까, 실체 없는 존재와 줄다리기를 한다. 어디까지가 내가 놀 수 있는 영역일까, 연산이 망연하다.
관계도 그렇다. 너를 대하던 내가, 나를 대하던 네가 변한다. 백수의 관계는 일, 조직, 직급의 영향권 밖에 있다. 더 이상 환상, 화장이 없다. 오롯이 존재 자체로만 기능한다. 내가 알던 관계의 이면, 나란 사람의 민낯을 본다. 깨닫는다. 그래 언제까지, 어떤 모습이어도 받아줄 관계란 건 없다고. 그저 한때 운좋게, 과분한 이해를 받고 살았을 뿐이라고. 불금의 치킨처럼, 깐부가 사라진다.
그렇게 일, 사람, 계좌의 포트폴리오가 바뀐다.
다시 걷는다. 내가 알던 풍경이 사라진다. 걷는다. 내가 모르던 풍경이 다가온다. 걷는다. 사라지고, 나타난다. 차곡차곡 걸음마다, 차곡차곡 생각이, 차곡차곡 정리된다. 계속 걷는다. 지난 일에 더 보탤 건 없다. 그저 그만큼의 나, 그만큼의 인연. 금연처럼, 생각보다 어렵지만, 생각보다 쉬운. 훌훌 털면 아무 것도 아닌, 담배 연기처럼 가벼운. 그러나 언제고 다시 입에 물고 있을지도 모를.
여전히 불안 위를 걷는다. 러너스 하이를 만난 영혼이 머리 뒤쪽으로 빠져나와 걷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본다. 스치는 사물과 사람이, 바둑판의 말처럼 작아진다. 어디로 뒀어야 했는지 복기하고, 어디로 둬야 할지 가늠한다. 계속 걷다 보면 좀더 명쾌해질까. 바둑까진 아니어도, 오목 정돈 둘 수 있을까.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경계 너머 피안을 발견할까. 아직은 그저,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