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감정의 지도

- 불안, 분노, 침묵의 언어 읽기

by mjbooks

나는 한동안 아이들의 감정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교사는 그래야 한다고 배웠고, 그래야만 좋은 교사라고 믿었다.
아이의 마음을 읽고, 행동의 이유를 짐작하고, 감정을 조율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이 교실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실에서 내가 더 자주 마주친 것은
아이들의 감정보다 나 자신의 감정이었다.

아이의 감정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지만 나의 감정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가장 자주, 가장 깊게 나를 붙잡은 감정은 불안이었다.


불안은 늘 사건보다 먼저 도착했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기 전,

교실의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그 순간,
나는 이미 다음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 상상은 언제나 가장 나쁜 쪽으로 먼저 향했다.

이 상황이 커지면 어쩌지?
다른 아이들이 놀라면?
내가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는 교사가 되면?

불안은 생각보다 빠르다.
판단이 개입하기도 전에 몸을 먼저 장악하고,
그 몸의 긴장은 곧 나의 말투와 시선, 움직임을 바꿔 놓는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보기 전에 상황을 먼저 보았다.
아이의 감정보다 교실 전체의 안정과 흐름을 먼저 관리하려 했다.

그 선택은 늘 좋은 의도에서 시작했지만 결과는 종종 달랐다.
아이에게는

조금 빠른 제지,
조금 많은 말,
조금 숨 막히는 시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으면 통제 욕구로 변형된다는 것을.


분노는 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의 분노는 비교적 단순했다.
하기 싫을 때, 멈추고 싶을 때,
자기 방식이 무시되었다고 느낄 때.
아이의 분노에는 분명한 계기와 맥락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분노는 달랐다.
대부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안쪽에서만 머물렀다.

교사는 화내면 안 된다는 말,
어른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기준,
이 정도는 견뎌야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

그 생각들은 분노를 없애주지 않았다.
그저 더 깊숙이 밀어 넣었을 뿐이다.

억눌린 분노는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말수가 줄고, 표정이 굳고, 하루가 끝나면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왔다.

몸은 이미 지쳐 있었지만 마음은 쉬지 못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분노를 인정하지 않는 교사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혹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침묵.

아이의 침묵 앞에서 나는 가장 불안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
아무 반응도 없는 얼굴.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해 나는 자꾸 말을 던졌다.

우리 OO는 오늘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말해 볼까?, 표현해 볼까?, 괜찮아? 등등

그 말들은 아이를 위한 질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말에 가까웠다.
아이의 침묵보다 그 침묵 앞에서 흔들리는 나 자신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감정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불안은 문제 행동의 전조가 아니라 안전을 확인하고 싶은 신호라는 것.

분노는 부적절한 감정이 아니라 경계가 무너졌다는 알림이라는 것.

침묵은 거부가 아니라 아직 말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표시라는 것.


이렇게 읽기 시작하자 아이의 감정도, 나의 감정도 조금 덜 날카로워졌다.

감정을 없애려 하지 않고 의미를 읽으려 할 때, 교실은 조금 덜 긴장된 공간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불안해지고,
여전히 화가 나고,
여전히 침묵 앞에서 흔들린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감정들이 나를 부족한 교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교실에 서 있게 해준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이의 감정 옆에
내 감정을 함께 놓고 조심스럽게 지도를 펼친다.

정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덧붙여, ]

이 글은 아이들의 감정을 잘 읽는 교사가 되고 싶어서 쓴 글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의 감정 앞에서 자주 흔들리고, 자주 불안해하고, 자주 침묵을 견디지 못했던

나라는 교사가 나를 돌아보기 위해 쓴 기록에 가깝다.

나는 여전히 완벽한 교사가 아니다.

상황을 먼저 통제하고 싶어지고,

분노를 삼킨 채 하루를 버티고,

아이의 침묵 앞에서 조급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 감정들이야말로 이 교실에서 내가 사람으로 서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조금 늦게 배웠기 때문이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가 아니라,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라는 존중으로 닿기를 바란다.

나는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이기 전에

감정을 배우는 사람으로 오늘도 교실에 들어선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