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서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혜화역 2번출구
학창시절 축제 뒷풀이를 하던 대학로 거리
신문지를 깔고 막걸리를 마시며 시작한 뒷풀이는
언제나 어깨동무를 하고 아침이슬을 부르는 것으로 끝나곤 했지
첫 미팅 그녀와 커피를 마시던 학림다방은
이제 문화재가 되어 나를 반기네
사람들로 북적이는 맞은 편 별다방에서
카페라테 한잔을 테이크 아웃해 거리로 나선다
마로니에 공원에는 오래전 그날처럼
사랑을 시작하는 청춘들의 설레임이 가득 하고
식어진 커피를 마시고 나서
콘서트를 같이 보기로 한 딸아이와 친구들을 만난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끊임없이 재잘대며 깔깔거리는 아이들과
김광석이 1000일동안 공연한 학전소극장에서
작은 클래식콘서트를 관람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딸아이와 친구들은 오늘의 이 시간을 추억해줄까?
그들은 이 시간을 잊어도
그때도 학림다방엔 여전히
미팅을 하는 젊은이들이
한잔의 커피를 나눠 마시고
4월의 마로니에 공원은
시작하는 첫 사랑의 설레임으로 가득 차고
학전 소극장을 지날 때는
김광석의 “나의 노래”가 귓가를 울렸으면 좋겠다
마치 오늘처럼...
그곳은
찌지직소리가 나던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고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혼자서 킥킥대던 곳
그곳은
혼자서 올라가 자다가
좁은 통로로 떨어져
단칸방 여섯식구를
놀래키던 곳
그곳은
대학입시 낙방한 날
혼자서 울다가
엄마에게 들켜 둘이 껴안고
꺼이꺼이 울던 곳
그곳은
지금은 없지만
추억과 함께
내 마음 속 한 켠에
언제나 함께 하는 곳
‘성냥 사세요’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겨울
성냥으로 추위를 녹이던
소녀가 궁금해진다.
장국영도 죽고 없는 겨울
영웅본색에서 성냥을 씹던
주윤발이 궁금해진다.
지금은 없어진
학교 앞 카페 실크로드
입구에서 가장 떨어진 자리에 앉아
성냥탑을 쌓고 놀던
후배가 궁금해진다.
담배를 끊어
주머니에 라이터도 없는 겨울
케이크에 딸린
한 개의 성냥으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999 ****1004
999 ****8282
강의 시간에 울리던 삐삐의 진동은
항상 너와의 비밀교신이었지
기억하니
검정색 삐삐가 울리면
나의 마음은 교실에서 빠져나와
너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수업이 끝나고
학생회관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돌리던
수동식 전화기의 다이알은
왜 그리 늦게 돌아가던지...
이윽고 전화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면
전생의 연인을
100 년 만에 만난 듯
나는 영화 속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지
고등학교 시절
허기가 일상이던 나이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도시락을 까먹어버리고
막상 점심시간에는 매점이 북적거렸다
노란색 단무지에 쑥갓 고명을 얹은
단촐한 우동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매점우동의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재수생 시절
용산역에 있던 대입단과학원에서
수업 중간 중간 급하게 먹던 우동
단돈 1000원이면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되주던
역전 포장마차 우동집의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대학교 시절
친구들과 처음 놀러가던 엠티
지금은 없어진 경춘선 완행열차 안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차장 아저씨가
왜건을 밀고 가면서 주전자 속 뜨거운 물로
급하게 만들어 주던
우동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우동을 함께 먹었던
친구들, 여행들
그리고 내 청춘을 데워주었던
따뜻한 우동국물 맛을
잊을 수 없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형과 누나의 손에 이끌려
지하철1호선을 타고
처음 왔던 정독도서관
형과 누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막내와 놀던 도서관 앞뜰에는
벚꽃 향기가 가득했었지
대학입시 공부하던 여름날
좁아서 너무 더운 동대문도서관을 피해
찾아온 정독도서관
천장에 달려 연신 돌아가던 선풍기도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공부하던
수험생들의 열기를 식혀주진 못했지
2학기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프레쉬맨시절
또 다시 찾은 정독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기엔
너무 예뻤던
노란 은행잎과 파란 코스모스
같이 온 동급생 여친과 벤치에서
떠들고 웃는 시간이 더 많았지
아빠가 되어 딸아이와 함께
찾은 정독도서관
겨울방학숙제를 위해
딸아이는 필독도서인 최인훈의 “광장”을 빌리고
소설가를 꿈꾸는 아빠는 “소설쓰기의 모든 것”을 빌린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북촌한옥거리는
마술쇼와 버스킹공연으로 북적거리고
딸아이의 눈에는 호기심이
아빠의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하지
동창회장의 긴급호출에
시청앞 고깃집에서
입학 30주년 기념으로 모인 동창들
학과실에서 통기타를 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열창하던
헌국이는 동창회장이 되어
학교발전기금 납부를 독려하고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밤새 소주를 마시던 주호는
소주회사의 이사가 되어
명함을 돌리고 있네
축제에서 클래식 기타연주로
여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엘비스 닮은 형석이는
보험회사 지점장이 되어
여직원들의 마음을 울리고
만화방에서 밤새 무협지를 읽으며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를 하던 준규는
화장품대리점을 하며 여성색조화장에 대해 떠들고 있네
문학회에서 글은 안 쓰고
막걸리를 마시며 화염병을 만들던 재호는
자기 책을 내고 작가가 되어 책 홍보를 하고 있지
항상 캠퍼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영원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던 나는
동창회에서도 자리를 못잡고
이 자리 저 자리를 옮겨 다니며
소설을 써서 세상을 향해
마지막 어퍼컷을 날릴 거라며
큰 소리를 치고 있네
고깃집을 나와 2차로 호프한잔을 하고
남은 몇 명이 간 당구장에서
게임비 내기 당구가 끝나면
지하철이 끊길 시간
익숙하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시청앞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족이 있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지
30년 전 스무살의 어느날처럼...
5월의 어느 주말 인사동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넘쳐난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막지 못하는
인사동의 흡인력, 그 중심에 나도 서있네
중고등학교 시절 처음 온 인사동은
전통찻집과 작은 미술관들로 들떠있었고
시험이 끝나 홀가분한 친구들은
주머니에 돈도 없이 많이도 돌아다녔지
대학생 시절 인사동은
미팅 후 그녀와 걷는 거리였지
점점 늘어나는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커피숍으로
옛 멋을 잃어가는 거리가 마냥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 했기에 설레임 가득한 거리였었네
인사동 거리를 가장 많이 거닐었던
아내와 결혼을 하고
이제는 딸아이와 함께 그 거리를 거니네
새로 지은 멋진 건물과 온갖 기념품들
실타래엿과 회오리감자, 먹거리도 풍성한 거리
딸아이는 풍요와 먹거리로 인사동을 기억하겠지
그 추억 속에 나도 함께 하기를...
내가 이 거리와 같이 거닐던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때도 인사동 거리가
희망과 행복으로 넘쳐나기를
얼마나 소망하는지
홍대입구역에는 홍대만 있는 줄 알았지
가보니 그렇지 않더군
주말 홍대입구역은 인디밴드의
라이브로 시끌벅적했었지
크라잉넛은 밤이 깊은데 말을 달리고
체리필터는 고양이의 낭만을 외치더군
미대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의 예술감각을 시험해보던 패션의 거리였었네
거리를 가득 메운 청춘들은
패션거리에서 스카프와 브로치를 고르고
서로를 바라보며 패션품평을 해주었지
신촌에서 자취를 하던 친구는
주말이 되면 심심하다고 나를 불렀지
우리는 친구가 미대에서 가져온
폐목재를 잘라 친구의 침대를 만들어 주고
캔맥주를 마시며 예술영화를 같이 보았지
파란 화면에 깜박이던
도스와 노턴프로그램들이
지겨워 지는 밤이 되면
우리는 발정난 고양이처럼
낭만을 찾아 홍대거리를 헤메었지
누군가 우리를 보았다면
늑대 두 마리가 어슬렁거린다고
파출소에 신고라도 했을 걸
아름다움을 찾아 젊음을 소비하던
홍대거리를 오늘 다시 찾아왔네
젊은 날 찾아 헤메이던 낭만은 사라지고
은행 대여금고에 압류된 골드바를 찾기 위하여
금고를 열고 동영상을 찍지만
골드바는 없고
공허한 자괴감만
한 줌의 먼지처럼
다섯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버리지
그렇게 우리는 오늘 하루
**은행 홍대입구역지점에서 홍대를 추억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