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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레드릭 Sep 24. 2021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다.

한국 부모는 자식을 이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자식 사이가 누가 이기고 지고 하는 관계가 아닐 텐데 말이다. 모든 체육 종목에서 체급을 따져 대결을 하는데 하물며 최소 25-30세의 연령, 학력, 신체적 차이가 나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식을 이길 수 없다는 건 ‘자식이 맘대로 안된다’ 또는 ‘부모 말을 안 듣는다’는 뜻일 것이다. 자식을 맘대로 하려는 부모는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식을 키우려는 것인데, 자식은 원하는 매뉴얼대로 조립되는 AI 로봇과 달리 자기만의 생각과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다. 자식을 이기려는 부모는 부모의 생각, 가치관, 철학을 자식에게 강요한다고 볼 수 있다. 부모의 시대와 자식의 시대가 다른데 부모 시대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자식을 이기려는 부모는 어리석다.

 

아마도 세계 최고의 입시 지옥에서 빠른 입신양명을 통해 내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심리에서 비롯되었겠지만, 단단히 삐뚤어진 방법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사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명문대 입학생의 상당수가 공교육을 통한 정상적인 방법으로 입시를 치렀다. "교과서와 EBS로 공부했어요."라는 말은 공공연한 거짓말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공교육의 방법으로 성공적인 입시를 치른 아이들은 무수히 많다. 내가 근무한 학교의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 공공연한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을 안다. 물론 드라마 SKY캐슬에 나온 것처럼 서울대 의대를 학종으로 가는 경우는 극단적인 예이기 때문에 억대의 과외를 맡기는 스토리가 가능하고 서울대나 의대 진학의 경우는 유명 인강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꽤 있다. 하지만 나머지의 경우는 학교 수업과 EBS로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가서 밤 9시~10시까지 쉬지 못하고 스파르타식 공부를 강요당한다. 자식이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단단히 삐뚤어진 길로 자식을 내몰고 있다.


삐뚤어진 길에 놓인 자녀들은 힘들고 지치는 나날이 반복되지만 스스로 결정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지치는 날들을 견디면서 ‘무기력’을 학습한다. ‘학습된 무기력’의 증세는 능동성과 자기 주도성이 제로인 상태로 삶의 활력과 즐거움이 전혀 없는 무표정과 무의욕이다. 성취감 있고 성공적인 학습이 될 리 없으므로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자식이 맘대로 안된다’ 또는 ‘부모 말을 안 듣는다’로 해석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아이의 결정과 의욕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경청하여 목표에 대한 심리적, 물리적 지원을 바탕으로 키운다면 자식을 이기지 않아도 존경받는 부모가 될 것이다.


그렇다. 자식은 맘대로 안된다. 그리고 그게 맞는 거다. 자식이 맘대로 된다면, 그 자식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부모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긍하고 부모의 기대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 자식은 여태껏 자신이 결정한 삶은 없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과 탐색 과정이 없거나 있었더라도 자신만의 정답을 찾지 못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자식은 끊임없이 부모에게서 답을 물어야만 할 것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보지 못했고 던져준 정답대로만 살았으니 성인이 되어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지 못한다.


자식을 키우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과 자기 주도성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고 주도할 수 있도록 강요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의 아들도 자신의 꿈을 찾는데 오래 걸렸다. 막연하게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선택했지만 고1 국어 수행평가를 할 때까지도 자신이 왜 공부를 하고 있는 건지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국어 수행평가 – 시 경험 쓰기>를 하면서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이유를 찾았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중 


내 친구들을 보면 항상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알고 있다는 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일을 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 답을 내놓지 못한 채, 나는 계속해서 현재에 머물며 희희낙락했다. 나의 미래를 마주 보기 두려워서.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했을 때도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단지 성적을 잘 받고 싶어 의자에 앉아 펜을 끄적였다.


 시험이 끝나고도 여전히 마음속엔 물음이 남아있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할까? 무엇을 위해 난 이렇게 지금을 포기하며 펜을 드는 것일까? 어차피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계속 이렇게 그저 그렇게 앉아서 공부하고 그저 그런 직업을 갖고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내 안에 무언가가 깨진 느낌이었다. 삶의 이유를 잃어버려 계속해서 하루하루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전부터 내 방에 붙어있는 부모님이 내게 남긴 글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었다. 글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점점 마음이 쓰라렸다. 부모님이 항상 하셨던 말씀이 이제야 떠올랐다. 나 혼자만 고민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전부터 해답은 바로 앞에 있었는데.


꿈은 세상에서는 직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공무원이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꿈인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꿈은 꿈다워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돈이나 조건이 기준이 되는 밥벌이가 아니라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꿈이 되는 것이라고.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부지런히 하다 보면 자신은 어느 순간 훌쩍 성장해있고 꿈을 이뤘을 때 성취감과 보람은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고.


예전에 읽었던 책 데미안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가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알을 깨고 나가는 새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느끼게 될 것이고 그만큼 성장하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 확실한 꿈을 가지고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지 않지만 나는 성장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알을 깨고 나가는 새처럼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부딪혀볼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게도 꿈이 생길 것이고 그 꿈을 이루어내는 성취감과 보람으로 이 세계에서 나의 존재 이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 시에서처럼 끊임없이 길을 걷듯 계속해서 내 자아를 찾아 나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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