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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레드릭 Sep 24. 2021

나, 대학 갈래

나, 대학 갈래.

중3 게임폐인 아들의 이 말은 평화롭고 잔잔한 우리 집에 예상치 못한 파문을 일으켰다. 당연히 실업계 가서 취업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극구 말렸다. 공부에 재능이 있고 공부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도 힘든 게 대학공부인데 공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네가 왜 대학을 가려고 하느냐? 대학은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다.


“나, 공부 재능 없어?”

“재능 있어. 안 해서 그렇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교사인 엄마가 보기에 우리 아들은 한 번도 한국에서 말하는 ‘공부’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공부를 한다면 잘할 것이 분명했다.

어릴 때 하루 종일 책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책을 끼고 살았고 뇌 발달, 인지 발달론, 정서 발달론과 같은 유아 발달 이론을 공부한 엄마가 지덕체의 균형 잡힌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씨를 뿌리기만 하면 쑥쑥 자랄 것이 분명한 유기농의 튼튼하고 건강한 토양이 분명했다.


입시지옥에서 무슨 애를 키워?라는 회의로 애초에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었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나도 부족할 판에 균형 잡힌 인간은커녕 입시지옥 속 극도의 경쟁에 내몰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겼다. 

그때부터 우리는 몹시 바빠졌다.

적어도 후진 부모는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민도 생각해봤지만, 이민의 성공률은 고작 50%였고 실패 원인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원활하지 않은 외국어 소통과 그에 따른 불화였다. 특히, 청소년기에 사춘기와 겹치면서 어려운 상황이 된다. 하긴, 한국어로도 부모와 자녀의 소통이 잘 안되는데 하물며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외국어를 구사하는 자녀와 외국어 못하는 부모 사이의 소통, 부모가 외국어를 잘해도 그들만의 속어를 알아듣는 것은 부모에게 역부족이다.


한국에서 키우기로 결정.

부모 공부를 위해 국내 출산 서적과 육아책을 모조리 읽고 외국의 책도 주문해서 읽었다. 

임신에서 출산까지 시기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챙겨야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챙겼고 막달까지 수영과 라마즈 호흡을 열심히 한 덕에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자연분만으로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출산의 순간, 남편은 내 이마에 뽀뽀를 해주면서 내 기분을 정확하게 한 마디로 물었다.

“엄마로 새로 태어난 기분이 어때?”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고 모성애라는 것이 미리 장착되었던 것처럼 내 아이를 중심으로 이 세상이 움직이는 ‘엄마’라는 존재로 새로 태어났다.


교육학 이론에 따르면, 0~4세까지가 아이의 인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신체적, 정서적 발달의 바탕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아이의 평생을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교육학이 발달한 유럽에서는 이 결정적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일찍이 아버지의 유급휴직과 육아도우미 지원을 나라에서 보장해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정이 좀 다르다.

아버지의 유급휴직은 최근에 생겼으나 극히 드물고 국가에서 보장해주는 육아도우미 지원도 없이 오롯이 부모가 아이를 책임져야 했다.

부모가 사회 초년생으로 발을 디디고 가장 열렬히 일해야 할 때 자녀를 출산하게 되고 사회생활에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아도 부족한 지경에 놓인 채로 자녀의 결정적 시기는 흘러가 버린다. 결정적 시기를 놓치고 초등 때부터 아이들은 공부가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학원을 돈다. 대부분 부모의 강요로 학원을 간다는 점에서 자발적인 아이의 선택권은 전혀 없다. 공부의 근본 취지인 ‘학문적 호기심과 흥미’ 같은 것은 어디로 증발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 아이들은 ‘친구와 함께 노는 것은 즐겁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유치원에 간다.

한국 아이들은 ‘남보다 좀 더 빨리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영어 유치원에 간다.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시스템 속에서 내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인간의 뇌세포 속 뉴런의 돌기는 어릴 때 다양한 경험을 할수록 더 많은 가지를 뻗는다.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 주면 가지처럼 생긴 뉴런 돌기는 다양한 방향으로 돋아나게 되고 가지가 다양할수록 다양한 분야에 해당되는 잠재적 능력의 길을 터놓는 것이다. 한 가지 경험이나 학습을 반복적으로 하면 한 가지가 굵게 발달하는 대신 많은 가지를 뻗지 못한다. 한국에서 흔히 어린아이가 몇 달만에 한글을 깨쳤다는 것으로 천재성을 가늠하는데 사실, 그것은 반복을 통한 강화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천재성이라기보다 짧은 기간에 ‘한글’이라는 가지만 비정상적으로 굵게 발달시키는 위험한 방법이다.


자연은 최고의 놀이터이자 스승이다.

한국 조각의 대부 강대철 선생님의 부인께서 아들을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놀게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아들이 카이스트에 진학해서 실험물질 수입이 끊겼을 때 화학물질 몇 개를 섞어서 똑같은 물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진짜 창의성은 자연에서 나온다는 것은 모든 아동학자들의 공통 견해다.


아들이 3살 때 서울에서 이천으로 온 이유는 아들의 아토피였다.

모든 것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자연’이 없는 서울에서 이사 온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다. 이천 구석구석을 돌면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집을 찾았다. 매일 쏟아지는 음이온과 피톤치드를 맞으면서 나뭇잎 소리와 새소리로 아침을 맞을 수 있는 아리산 밑에 위치한 아파트 1층에서 실컷 뛰고 베란다를 넘어서 펼쳐진 우리만의 정원과 산책길뿐 아니라 산을 기어 올라가면 꿩집 속 꿩알을 구경하는 탐험도 모두 우리 것이었다. 베란다로 들어온 청개구리랑 얘기를 나누고 고사리 손으로 살살 잡아서 바깥에 돌려보내주는가 하면 곤충 책과 채집망을 들고 우리만의 정원으로 철마다 곤충 탐험을 나가고 식물도감을 들고 정원의 풀이름을 불러주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빗소리가 이렇게 아름답구나! 감탄하며 한참을 듣고 눈이 내리는 날은 베란다를 풀쩍 뛰어넘어 눈밭에서 눈사람을 굴리고 볼이 빨개질 때까지 눈싸움을 했다. 정원 옆에 있는 정자에 해먹을 걸고 오후가 다 가도록 책을 읽고 정자 옆 우리 만의 축구장에서 축구공을 뻥뻥 차고 산책로에서 자전거를 따르릉 거리면서 다녔다. 침대 위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산소리를 들으면서 잠들 때까지 책을 읽었다.

 

자연 소리에 버금가는, 인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소리는 클래식 음악이다.

긴 세월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으로 검증받은 천재들의 작품, 클래식 음악은 물리적인 악기 소리만으로 벅차지만 인간 본연의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하여 현대에도 중세시대 바흐가 표현하는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이 집 안에 퍼지면, 우리 집 아침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는 뜻이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라흐마니노프…

아직 꿈나라에서 음냐음냐 자고 있는 아들의 아킬레스건과 종아리 마사지를 하고 입에 홍삼과 사과를 넣어 준다. 한국식 속도로 빨리 식사를 못하는 우리 가족은 서로의 밥그릇에 발라낸 생선살, 김치, 고기, 샐러드를 계속 올려놓고 서로의 입에도 계속 넣어 준다. 우리 집에 같이 지내던 제자는 우리 식사 모습을 보고 ‘천국’ 같다는 표현을 썼다. 천국에서는 서로 먹여준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어릴 때 먹는 것에 통 관심이 없어서 동화책 이야기로 정신을 쏙 빼면서 먹이면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냠냠 잘 먹일 수 있었다. 처음엔 그림이 뛰어난 한국 동화와 외국 동화, 크면서 철학, 과학, 수학이 들어간 책으로 변해갔다. 이억배, 김성민, 레오 리오니, 이모토 요코, 미하엘 엔데, 장 자끄 상뻬, 낸시 틸먼, 카타지나 코토프스카, 존 무스, 데이비드 섀논, 닥터 수스, 안네마리 노르덴, 쉘 실버스타인, 조애너 콜…

1개만 더 읽어 달라는 아들을 재우기 위해 <신기한 스쿨버스> 프리즐 선생님 비행기 옆에 타는 상상을 해보자고 슬쩍 눈을 감겨서 겨우 꿈나라로 보내곤 했는데, 어떤 때는 책 내용에 신이 나서 더 반짝반짝해진 눈빛으로 “엄마, 지진 실험하러 가자.” 해서 밤 10시에 놀이터에 가서 같은 실험을 10번 반복하고 온 적도 있다. 침대에 누워서 읽다가 손에 힘이 빠져 책을 떨어뜨릴 때 즈음 “그만 자자.”로 책 읽기는 마무리되었다.


어릴 때부터 자연에서 맘껏 뛰놀고, 거실 이중 책장·아빠 서재·안방 책장에 한 가득 아빠와 엄마가 엄선해서 물어다 놓은 보물책 속에서 실컷 놀고, 클래식이 늘 흘렀고, 걷다가 또는 함께 있다가 ‘왜?’라는 제스처나 물음이 나오면 기꺼이 아이의 속도대로 함께 탐구했다. 자기 주도적 삶을 살기 원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우리 교육론은 ‘교육은 학교에서 충분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수업시간 열심히 들으면 그걸로 충분해.’라는 메시지는 아이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학교 끝나면, 소위 한국식 ‘공부’는 그만해도 좋았다. 아니, 그만하도록 했다. 물론, 학교 방과 후 수업은 원하는 게 있는 경우 요리, 생물, 뮤지컬 같은 것을 들었지만 학원은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이런 아들이 갑자기 대학을 가겠다는 선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지 말라고 하니까 더 가고 싶어진 청개구리 심보일까? 곁에서 지켜본 엄마의 눈에는 중학교 내내 뚜렷한 목표 없는 학교생활 속에서 자기 존재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국식 지옥 공부에서 자유로웠지만, 친구들 모두 같은 트랙을 뛰고 있는데 자신만 그곳에서 벗어나 있는 소외감과 이질감. 졸업식 날 친구들과 교실 안에서 이리저리 뭉쳐서 즐겁게 사진을 찍는데 아들은 조금 낯설고 머쓱해 보였다. 아들의 대학 진학은 자기 존재감을 찾아보겠다는 결심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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