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인문계 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여러 케이스의 학생들을 보아왔다. 1년에 300명으로 치면 지금껏 60,000명의 케이스를 봤다고 할 수 있는데, 이름을 들어본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는 마지노선은 중3 겨울방학이었다.
중3 겨울방학이 지나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늦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대학입시는 이해와 암기에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방대한 양과 심도의 공부를 겨루는 것인데 고등학교 들어와서 시작하면 이미 ‘늦는다’. 고등학교 수업은 1교시부터 7교시까지 중학교 때와 완전 다르게 난이도가 높아진 전문적인 내용을 압축적으로 다룬다. 하루 종일 마구 쏟아지는 지식을 100% 이해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식 공부를 시작하지 않은 학생은 발차기도 배우지 않은 채 자유형으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맥스파워를 발휘해도 폭포 물살에 계속 뒤로 밀리고 결국엔 자기 혼자 저 멀리 뒤처져서 외롭게 허우적댈 뿐이다. 부모님들은 그 폭포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시기도 하는데 거의 불가능하다. 모든 법칙에 예외가 있듯이 아주 희귀한 경우도 존재한다. 고2말 8등급이 체육교육과를 가는 케이스처럼. 체교과는 내신 성적 4등급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므로 일반 학과와 좀 다른 경우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 맥스파워를 발휘해서 연어처럼 폭포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의지에 활활 불타는 경우도 보통 마지노선은 중3 겨울방학이다.
이 얘기를 듣고 중3 아들은 그해 겨울방학에 시작해보겠다고 했고 고등 EBS 강의 수학과 영어로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에 아들은 몹시 화를 많이 냈다. 공부는 안 해봤어도 책을 많이 읽어서 그렇게까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지 문제가 풀리는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것에 불같이 화를 냈다. 인생 최초로 공부를 시작해서 높은 허들을 하나 넘으면 더 높은 허들이 있고 그걸 넘으니 또 더 높은 허들들이 줄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니 화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줄줄이 허들을 하나씩 넘으면서 배움의 기쁨이 조금씩 싹트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수학 문제를 내고 풀어보라는 둥, 자기가 설명해주겠다는 둥, “와~ 너 진짜 이걸 이해했단 말이야?!”라는 엄마의 놀라움에 조금 우쭐하면서. 처음엔 문제를 내면 틀린 척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척이 아니라 그냥 틀렸다. 고등학교 수학이 이렇게 어려운지 처음 알았다.
영어도 수학과 마찬가지로 강의 이해는 빨랐지만 단어, 숙어라는 끝없는 허들이 있었다. 일단, 영단어와 숙어 암기는 뒤로 미루고 강의 진도를 나갔다. 전체적인 영어 흐름을 맛보는 것을 목표로.
국어는 따로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많이 해서 읽은 책의 양이 많고 읽는 속도에 있어서 정독을 할 때도 일반인 속독의 2배 이상 빨랐다. 고등학교 입시에서 상위권 학생 중에서도 국어 성적이 오르지 않거나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어릴 때 책을 읽지 않아서 텍스트를 통해 메시지를 읽어 내는 능력과 긴 지문을 읽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액 과외나 학원을 100개 다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오직 ‘어릴 때부터 독서를 했느냐’ 이 한 가지가 결정한다. 입시 상담 때 어릴 때 독서를 안 했다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독서를 할 것을 권장한다. 처음에 느리더라도 진짜 독서를 하다 보면 텍스트를 읽어 내는 능력과 속도가 늘게 되어있다. ‘어떤 분야의 책이든지 읽고 또 읽어가는 사이에 생각하는 힘, 글쓰기 능력, 전문지식, 의사소통 능력, 교양이 쌓여갑니다. 수박 겉핥기 식 독서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책들 가운데 그 책이 나에게 왜 의미가 있었는지, 읽고 나서 나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생각하기 바랍니다. 독서를 통해 생각을 키워온 큰 사람을 기다립니다.’ -2021 서울대 학생부 종합전형 안내문 일부
학원이나 과외의 경우는 수박 겉핥기 식 독서에 가깝기 때문에 특히, 생각하는 힘을 쌓을 수 없고 수능과 입시 내신의 국어 문제는 상당한 수준의 생각하는 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국어 성적을 올릴 수 없다. 국어 강의는 따로 듣지 않고 대신 독서를 했다.
중3 겨울방학이 지나고 고등학교 입학을 했다.
고등학교를 정할 때 엄마 입장은 ‘남고가 낫겠다’였다. 내신과 학교생활의 기록인 생기부로 대학을 가는 ‘수시 학종’은 남학생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형이고 남녀공학을 가는 경우 특히, 수행평가에 있어서 여학생들에게 백 번 밀릴 것이 확실하다. 어느 남학생이 수행평가 날짜며 복잡한 수행평가 기준표를 다 기억하며, 과목당 3개로 쳐서 전 과목 20개가 넘는 수행평가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떤 과목은 1개의 수행평가가 총 20장의 작문(A4 1장 분량 작문 20번 쓰기)이다. 대부분의 남학생은 수행의 지옥을 본능적으로 외면하고, 하더라도 성적 향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형식적 수준으로 수행한다. 따라서 꼼꼼하기로 타고난 여학생들과 함께 있는 경우는 바닥 점수를 깔아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옥의 고통을 견디고 수행한 결과가 바닥 점수라니… 남학생만 모인 남고가 좋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고입 지원 마지막 날, 고입설명회를 듣고서 아들은 집 근처 사립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고입설명회에 나오신 선생님이 ‘한 사람 한 사람 신경 써서 지도한다’는 말씀을 하셨다는데 그 말이 아들의 가슴에 꽂혔다. 어떤 동료 교사는 나보고 전략적으로 거기 보낸 거 아니냐고 물었는데, 생각해보니 엄마가 생각했던 남고는 이천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곳이었고 아들이 선택한 사립은 상위권을 빼고는 공부를 치열하게 하는 학교는 아니었다. 일부러 좀 덜 치열한 고등학교로 지원하는 전략을 써서 내신 1등급을 노리는 경우도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선의의 경쟁이 없는, 혼자 하는 외로운 싸움이기 때문에 상위 성적 유지가 더 어려울 수도 있고 또래와 학구적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적적하고 외롭기 짝이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야만 한다는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