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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Nov 01. 2022

억울한 죽음을 대하는 법

옛 역사 이야기

이것은 옛 이야기다.


우리는 1392년 선죽교에서 피살당한 정몽주를 흔히 만고의 충신으로 생각한다. 왕조를 전복하려는 이성계 일파에 맞서 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 무참히 살해당한 재상. 그의 마음은 이후 '단심가'로 잘 알려졌고, 여말선초를 다루는 드라마들은 정몽주의 죽음을 반드시 다루곤 했다.

 하지만 드라마들은 한 가지 의문점을 속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한다. '왜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느냐'는 점이다. 당대 최강의 무장이었으며, 당시 고려의 거의 모든 군권을 손에 쥐고 있던 이성계는 끝끝내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고, 그를 죽인 이방원을 세자에 책봉하지 않음으로써 본인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이성계와 정몽주 사이가 친구라서? 모양좋게 선위하기를 바랐던 이성계가 정몽주를 끝까지 설득하고 싶어서? 이 이유도 맞을 것이다. 나는 하나의 이유를 더 든다. 이성계는 정말로 정몽주를 존경했다. 아니 좋아했다. 그런데 왜 이성계가 정몽주를 좋아했는지, 존경했는지에 대해 드라마는 말하지 않는다. 그건 단순한 인간성 이상의 감정이었다. 왜 이성계가 정몽주를 좋아했는지, 존경했는지를 알려면 그의 인생을 짚어봐야 한다.그러면 드라마가 왜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는지도 알 수 있다.

 이를 알려면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한다. 김득배. 1312년생인 그는 무장이었고, 문인이었다.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공민왕(당시 강릉대군)과 함께 했다. 말하자면 왕의 최측근이었다.

 공민왕이 조카 충정왕의 석연찮은 죽음 뒤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오를때 김득배도 함께 했다. 왕의 측근이었던 그는 승진의 길을 걸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겨울, 원나라의 쇠망을 틈타 일어난 도적떼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안우 등과 맞서 싸웠지만 패했다. 이 패배로 수도 개경이 약탈당했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을 갔다.

 이듬해인 1362년 1월. 김득배는 원나라에서 같이 생활했던 정세운 등과 함께 개경 수복전에 나선다. 이 싸움에는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등도 함께 참전했다. 총 20만의 대군이 홍건적을 몰아내고 개경을 수복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 벌어진다. 총사령관으로 개경을 수복한 정세운을 시기한 김용-이 사람도 원나라에서 정세운, 김득배와 같이 있었다-이 안우, 이방실 등을 충동질 해 정세운을 죽이게 했다. 안우와 이방실은 정세운을 죽이기 전 김득배를 찾아가 함께 살해할 것을 권유했는데 이 때 김득배는 "신중하게 할 일"이라면서 거절의 뜻을 밝힌다. 안우와 이방실은 그런 김득배를 겁박해 결국 정세운을 죽여버린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의 반응이 묘했다. 김용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김용의 요청대로 안우와 이방실을 죽였다. 안우와 이방실. 김득배는 홍건적의 침입에서 나라를 구한 명장들이었고, 정세운은 총사령관이었다. 아무리 김용이 공민왕의 최측근이라지만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나라를 구한 장수들을 갑자기 죽여버렸다.


 아무튼, 공민왕이 휘두른 죽음의 칼날은 김득배에게로도 다가왔다. 처음에 김득배는 도망갔는데, 왕명으로 붙잡힌 아내가 고문에 못이겨 김득배의 도망 장소를 알린다. 결국 추격조가 파견됐고, 김득배는 이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51세. 허망하고 억울한 죽음이었다. 기록은 왕이 머무르던 상주의 거리에 내걸린 그의 목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김득배의 문하에서 있던 이가 정몽주였다. 1338년생인 정몽주는 김득배가 죽었던 1362년 25살이었다. 2년전 과거에 막 합격해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시작하자마자 홍건적의 난에 휘말렸다. 가까스로 난이 끝난 뒤 맞은 것은 자신을 이끈 스승이자, '라인'이었던 김득배의 억울한 죽음이었다.

 스물 다섯살의 청년은 이 때 왕에게 청을 넣었다. 김득배의 시신을 거두어 제사를 지내겠다고. 왕의 명령으로 죽어 저잣거리에 내걸린 머리를 다시 거둔 뒤 제사를 지내겠다는 요청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이 청은 공민왕의 승낙을 받았다. 김득배의 시체를 수습한 정몽주는 이런 글을 지었다.


“아아 하늘이시여! 나의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아 하늘이시여!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듣건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은 하늘이요,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중략)...  나는 그의 충성스럽고 장한 혼백이 천추만세토록 반드시 구천(九泉)의 지하에서 눈물을 삼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운명이란 것이 어찌 이러합니까? 어찌 이러합니까?”


이 제문에서 정몽주는 김득배의 죽음이 누구 때문인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대저 '하늘의 도(道)'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 이래 모든 동양, 아니 동서양을 막론한 모든 이들이 고민했던 주제. '하늘의 도는 과연 실존하느냐'에 대한 말이다. "선한 자에 상을 주고, 악한 자에 벌을 내리는 것은 사람입니다"


이건 다시 말하면, 억울한 사람을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나는 정몽주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자면 바로 이 김득배의 죽음이라고 본다. 억울했던 스승의 죽음 앞에서 제자는 맹세했다. "다시는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분명 그의 목소리는 떨렸을 것이다.


그리고 정몽주는 기어코 그 말을 실천했다.


그의 공직 생활은 결코 빛나거나 찬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시밭길뿐이었다. 그의 이 다짐을 훼방놓기 위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몽주는 끝끝내 이 말을 지켰다.

 

공민왕 21년인 1372년, 정몽주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북원으로 인해 육로는 막혀있어 해로로 갔는데, 중간에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했고 정몽주는 해류에 떠다니며 말 안장을 씹어 먹으며 13일을 버틴다. 당시 명나라 황제 주원장(홍무제)은 사람을 풀어 정몽주를 찾은 뒤 고려로 돌려보낸다.

 그렇게 바다에서 죽을 고생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도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고, 심하면 PTSD를 일으킬 수도 있다. 정몽주는 다시 바다로 나아간다. 공민왕이 죽은 뒤인 1377년(우왕 3년) 정몽주는 일본으로 파견된다. 조정을 비판하는 그의 태도에 원한을 품은 높은 관리가 '왜구를 금지시켜달라'는 무리한 요구조건을 내걸고 정몽주를 일본에 파견한 것이다. 전혀 힘들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은 정몽주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논리정연한 말로 일본인들을 설득시켜 일시적인 왜구 침략 중지라는 성과를 이뤄낸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때 정몽주가 노예로 끌려가던 고려 사람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이들을 구해냈다는 것이다. 그는 고려로 돌아오자 마자 다른 고위 관리들을 설득해 돈을 더 마련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구해낸다.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영역안에서 그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1384년. 고려와 명나라는 갈등을 빚었다. 주원장은 고려 사신들이 올 때마다 족족 억류했다. 누군가는 가서 괴팍한 성미의 주원장을 설득시켜야 했다. 죽을 자리라는걸 알았던 사람들은 뇌물을 쓰거나 아픈척을 했다. 결국 정몽주에까지 차례가 돌아왔다. 12년전 죽을 뻔한 정몽주를 알고있던 우왕은 차마 가라고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의사를 묻는다. 정몽주는 대답한다. "가겠습니다". 명나라 수도 남경까지 보통 90일이 걸리던 그때. 사절단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0일 정도였다. 즉시 출발한 정몽주는 50일 만에 남경에 도착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중 뭔가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2년전 난파당해 13일을 물 위에서 버틴 사람이 취할 행동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홍무제도 그것을 눈치챘다. 정몽주가 올린 표문의 날짜가 50여일 전이었던 것을 본 홍무제는 정몽주에게 묻는다. "너 지난번에 왔다가 난파 당했던 그 사람이지?" 정몽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세의 사람이었던 홍무제는 정몽주가 처한 환경과,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고 임무를 수행한 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감격한 홍무제는 꼬여있던 고려와 명나라 간 외교관계를 회복시켜 주었고, 억류되어 있던 사신들도 데리고 가라고 했다. 단 한 사람의 책임감으로 난맥이었던 외교가 해결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충분한 동기는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스물 다섯살의 청년은 스승의 시체 앞에서 세상을 더 좋아지게 만들겠다는 맹세를 했고, 빛나는 책임감으로 이를 지켰다. 그 과정에서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사람들은 그를 더더욱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다. 이성계가 정몽주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했던 건 그의 높은 학식이나 왕조에 대한 충성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몽주라는 사람이 책임감을 갖고 세상을 나아지게 하려 노력하던 공직자였기 때문이다. 그 공직자를 내 왕조에서 품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명성 높은 사람까지 합류해야 왕조 건설의 명분이 선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그 계산과 판단 속에는 무엇보다 최선을 다한 한 공직자에 대한 경의와 존경의 표현이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가 이방원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들이 이런 정몽주의 행적을 그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옛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주말동안 되풀이하여 고려사에 있는 정몽주 열전을 다시 읽었다. 오랜만에 다시 정몽주를 생각했다.


이것은 옛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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