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CA 덕수궁관
임진왜란 때 경복궁 ・ 창경궁 ・ 창덕궁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는 바람에 1593년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가 이곳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저택에 머물면서 경운궁(慶運宮)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국립현대미술관의 덕수궁관이 대공사에 들어가게 되어 가을 전시가 <덕수궁 야외 프로젝트 : 빛 ・ 소리 ・ 풍경>이란 타이틀로 덕수궁 경내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덕수궁의 옛 이름을 아느냐는 전시투어 안내인의 물음에 순간 뜨끔했다. 내게 덕수궁은 고종황제와 덕혜옹주 그리고 어린 내 아들을 데리고 친정엄마랑 놀러 왔던 개인적인 기억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德) 자, 목숨 수(壽) 자,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은 고종이 1897년 아관파천에서 환어할 당시엔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 아니었다 한다. 1904년 고종의 침소인 '함녕전'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중화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만 거다. 황급히 복원 공사에 착수했으나 을사늑약(1905)이란 치욕을 겪게 되는 가운데 넉넉지 못한 재정으로 단층 건물로나마 겨우 축조했다.
궁궐의 상징인 정전(正殿)다운 위엄이 중화전에선 전혀 보이지 않아 방문객들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나 또한 그중의 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쓸쓸했다.
'중화문' 옆 '동행각'에선 장민승과 양방언의 <온돌야화(溫突夜話)>가 전시 중이다. 20세기 초 주한 외국 공사관 및 외국 선교사, 조선총독부의 일본 사진가 등이 사대문 안에서 촬영한 100년 전 사진을 통해 대한제국, 경성 그리고 서울의 모습을 재일 한국인 음악가인 양방언의 애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재구성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엑스트라 같이 우연히 찍힌 주변 서민들이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무명인이란 동질감이 느껴졌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이름 모를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는 그런 감정 말이다...
'석조전'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1897년)하여 경운궁이 황궁으로 되면서 시류에 맞게 지은 대표적 근대 서양식 건축물 중 하나로, 완공된 건 순종 3년(1910년)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전 서관'은 1933년 덕수궁을 공원으로 바꾼 일제가 이왕가 미술관으로 지어 1938년에 완성한 것이며 분수대도 그때 만들어졌다.
중화전에서 걸어 분수대를 돌아 석조전 계단을 올라 서관 쪽으로 들어서면 김진희의 <딥 다운 – 부용>이 전시되어 있다.
거미줄 같기도 하고 빛을 찾아 날아다니는 벌레떼 같아 보이는 이 설치물은 작은 전자부품들을 그물처럼 이은 거다. 본체에서 분리된 스피커에선 지지직 잡음이 작게 들려왔다.
덕수궁 주변을 떠다녔고 현재도 떠다니고 있을 공기 중의 여러 소리들을 들려주는 모습에서 궁궐 처마에 줄지어 앉아 있는 잡상(雜像)이 문득 떠올랐다.
석조전 서관으로 가는 2층 테라스 복도 끝 코너엔 커다란 네 장의 초상 사진이 동서남북을 향해 걸려있다. 정연두의 <프리즘 효과>다.
"한 줄기의 빛을 받은 프리즘이 굴절되어 여러 가지 색의 빛으로 발하듯이, 하나의 역사적 순간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사진 속 노인과 소녀는 고종과 어린 딸 덕혜를 의미한다. 세계 열강의 공관들이 사방에 둘러 있는 덕수궁에서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바로 일으키려 애썼던 국왕이며 아버지인 인간 고종이 보여 순간 처연해졌다.
'옛날에 임금이 머물던 곳'이란 뜻의 석어당(昔御堂)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행궁으로 삼은 곳이다. 전란으로 엄청나게 피해를 입은 창덕궁을 복구하는 동안 임시거처로 삼았으나 결국 선조는 이곳에서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석어당은 세조의 장손이자 성종의 큰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고택인데, 당시엔 보기 드문 2층 집이고 덕수궁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다. 궁궐 건물로 지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석어당 왼쪽에 '즉조당'과 '준명당'이 있는데, 즉조당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임금으로 즉위한 곳이다. 석어당과 즉조당이 덕수궁의 뿌리이며, 준명당은 후에 고종이 따로 지은 거다.
그 오랜 세월로 석어당과 즉조당엔 얽힌 사연들이 참 많다. 세조의 첫째 아들(덕종 추존)이 일찍 죽는 바람에 둘째 아들인 예종으로 왕통이 이어져 출궁 하는 첫째 며느리와 두 손자에게 세조가 마련해준 집이 석어당이었다. 후에 한명회의 계략으로 사위이자 월산대군의 동생인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지만 월산대군은 개의치 않고 이렇게 멋진 집으로 개축했다. 즉조당엔 광해군과 인목대비 그리고 인조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가 서려있다.
석어당에 전시된 권민호의 <시작점의 풍경>은 근현대사를 겪은 덕수궁을 연필과 펜으로 그린 한 폭의 풍경화다. 앞에 켜진 전구와 HYUNDAI 란 커다란 영문자 배경이 근대와 현대를 암시하고 있다.
고종의 침전(寢殿)인 '함녕전(咸寧殿)'다. 고종은 늘 불면증에 시달려 몽유병 환자처럼 곳곳을 돌아다니며 잠을 청했다고 한다.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년)으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어한 건 신변의 안전을 위한 선택도 있었다. 함녕전 온돌 수리로 대화재가 나는 바람에 고종은 3년간 중명전에 가있다 돌아와 1919년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함녕전과 함녕전 행각엔 이진준의 <'어디에나 있는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시리즈 — 불면증 & 불꽃놀이>와 오재우의 <몽중몽(夢中夢)>이 전시돼 있다. 일본의 불꽃놀이와 미국의 핵 실험 영상이 서로 마주 보는 벽면에 각각 투사되고 있는데,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현실이 누군가에겐 희망과 기쁨이 될 수 있음에 섬뜩했다. <몽중몽(夢中夢>은 VR기기를 쓰고 누워 덕수궁 일대를 돌아보는 영상인데 아쉽게도 체험을 못해봤다.
Q. 김진희 작가가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먼지가 소매에 내려앉아, 미미한 존재가 마치 아주 큰 존재가 되거나, 혹은 자신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 했는데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투어를 마치고 마무리를 위해 함녕전 마당을 보며 낮은 돌계단에 삼삼오오 앉은 우리에게 안내인이 건넨 물음이었다. 함녕전 처마와 행각 사이로 보이는 구름 한 점없이 청명한 하늘과 현대식 빌딩을 바라보고 있자니 원래라면 서울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을 시간인데 이토록 멋진 경험을 하게 한 건 과연 뭘까란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짤막하게나마 들려주게 됐다...@.@
그런 후 딱 5명에게만 주는 미술관 에코백 추첨에 처음 호명되자 진짜 큰 박수를 받았는데 이미 소원을 다 이룬 기분이었다!! 나아가고자 하는 길 앞에 어떤 난관이 나타나더라도 함녕전 마당에서 바라본 하늘과 내가 했던 말 그리고 박수소리를 떠올리며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미술선생이 되어있다.)
총 7군데의 전시 중에서 다루지 않은 건 덕홍전에서 열리고 있는 고종의 서재와 책가도다. 덕수궁 투어를 다녀온 건 이번 달 초에다가 뒤늦게 덕수궁 부분만 책으로 읽고선 꼭 다시 가봐야겠단 생각이 크던 참이었다. 때마침 10월부터 덕수궁관에서 근현대미술아카데미 유료 강좌가 시작된다 하니 오가며 놓친 부분을 하나씩 보충하기로 했다. 책과 함께 떠나보는 서울 고궁 투어가 기대된다...
대한제국 선포(1897년) 120주년을 기념한 덕수궁 전시회는 11월 말까지인데 야간 투어를 더 강추한다!!
2017년 블로그에 올렸던 전시회 감상글을 정리하려 브런치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