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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

브뤼셀 앤 파리

by 돌레인

여장을 풀고 잠시 숨을 돌린 후 간단히 챙겨 숙소를 나섰다. 목요일은 '오르세 미술관'이 밤까지 개장하는 날이라 나가라고 할 때까지 머물기로 작정했다.

사방이 볼거리 투성인 파리의 모습에 정신 팔리지 않으려고 신경 쓰면서도 연신 눈이 바쁘게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토록 멋진 풍경 앞에서 파리지앵들은 어찌하여 그리도 무심한지~! 경복궁 앞을 무심히 오가는 서울 사람들에게 외국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품을까 싶었다.

어쩌다 보니 루브르 궁전 외곽을 빙 둘러 걷게 되었다. 문을 통과해 안쪽의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문을 또 통과하니 TV나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익숙한 그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박물관 앞은 이미 인산인해여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카루젤 개선문' 앞 도로는 수많은 관광버스와 관광객으로 서로 뒤엉켜 있었다. 복잡한 루브르 궁전을 빠져나와 '카루젤 다리(Pont du Carrousel)'를 건너는데 저 멀리로 '노트르담'과 '예술의 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쏟아지는 비... 숙소에다 우산을 두고 온 걸 후회했으나 <미드나잇 인 파리>의 길(오언 윌슨)처럼 그냥 맞으며 거닐어도 마냥 좋았다.

한때 기차역과 호텔이었던 오르세 미술관 앞으로 갔다. 시계는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예매한 통합 입장권 덕에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공공시설이건 검색대 통과는 필수였다.






입장하자마자 동공과 입이 한껏 벌어졌다! 어디서부터 보는 거였더라... 이런 경우를 대비해 읽어온 책 내용도 당최 떠오르질 않았다. 휘적휘적 사람들 틈바구니를 비집으며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층계를 오르려 기둥 모퉁이를 도는데 구석에 앉아있던 한 흑인 청년이 나를 불러 세웠다. 첨엔 움찔했으나 경계를 늦추고 이유를 물어보니, 몇 시까지 미술관이 여느냐는 거였다. 그제야 밝은 얼굴로 내가 아는 대로 대답해줬다. 오늘은 목요일이라 밤 9시 45분까지 해... 고맙다며 어디서 왔느냐 물어 또 '사우스 코리아!' 했더니 '오우~ 안뇽하세요우~!!' 했다. 배운 청년일쎄~~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크로체성당을 처음 방문한 '스탕달'이 수많은 명작들을 보곤 호흡곤란이 왔다고 하던데, 나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머리가 갑자기 아파왔다.

점심때를 놓친 탓도 있어 미술관 내 카페에 들어가 샌드위치랑 커피를 시켜놓고 차근차근 안내도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옆에 앉은 여자분이 "저, 혹시 한국분이세요?"라고 물어와 나는 샌드위치를 입에 문 채 한껏 치켜뜬 눈으로 돌아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겨우 반나절만에 내 나라말을 들은 건데도 어찌나 반갑던지!! 오랫동안 다닌 회사를 퇴사한 그녀는 7개월째 유럽을 홀로 여행 중이란다. 일주일 후 영국으로 건너가 8개월을 채우고 귀국할 거라 했다. 서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자제한 채 그저 여행에 대한 얘기만 나누고난 후 막상 헤어지는 게 아쉬워선지 그녀가 목에 걸었던 오디오 가이드를 벗어 내게 쥐어줬다. 오르세 미술관 하면 이제 그녀도 함께 떠오른다... 건강하게 여행을 잘 마치시길... 나는 진심 어린 기도로 감사함을 전했다.



기운을 차린 후 맨 꼭대기 층인 5층으로 올라갔다. 오르세 미술관의 시계는 핫 포토존이어서 다들 인생샷을 찍느라 줄지어 있었다.


5층은 인상주의 전시실로, 책에서 본 유명한 작품들이 눈만 돌려도 여기저기에 다 걸려있었다. 일일이 사진으로 찍는 것도 왠지 별 의미가 없어 보여 내 마음을 끈 작품들을 눈으로 꼼꼼히 들여다봤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는데 한 외국인 아줌마가 사진기를 들이대며...뭐, 유명 작품들은 다들 이렇게 사진으로라도 담으려 하잖우~ 라며 미안해했다. 그렇죠, 뭐... 하하하;;;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산업시대 고된 노동자들의 삶을 담은 그림들 속에서 낯익은 파스퇴르 선생도 발견하고... 이젠 친구 같은 느낌의 고흐도 만났다. 고흐와 고갱은 마네와 모네처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시대의 커플(?)이 됐지만, 나는 고흐랑 모네를 더 좋아한다.



어떤 조각상을 그림으로 그리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을 누른 채 주위 사진을 찍는 척하며 잠시 맴돌았다. 그리곤 나도 마음에 든 조각상을 그리고 싶단 열망에 사로잡혀 아무런 도구도 챙겨 오지 못함을 매우 아쉬워했다.

만약 언젠가 또 기회가 온다면 오르세의 모든 조각상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내 스케치북을 채우고 싶다...



야간까지 개장이라 로비에서 즐거운 파티가 열렸다. 관람객들이 죄다 쏟아져 나와 분위기에 휩싸인 덕분에 나는 여유롭게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이 아주 잘 되어 있어 전부 못 들어본 게 아까울 정도였다.


나는 인상주의도 좋아하지만, 앵그르나 제롬 등 아카데미 미술에도 마음이 끌린다.


그런지 이 소년의 그림 앞에서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세례자 요한의 복장을 한 지인의 아들을 모델로 그린 탓인지 소년은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으나 너무나 아름답다. 나를 사로잡은 건 소년의 얼굴과 앙증맞은 다리의 모습이었다.

폐장 시간이 가까워 관람객들도 하나씩 빠져나갔다. 나도 이제 가야 할 시간... 또 보러 올게... 반드시...






시각은 10시를 향해가고 있는데 이제야 해가 지고 있었다. 영화 <비포 선셋>이 저절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19세기 화가들의 로망이었던 프랑스 아카데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와 루브르 궁전을 잇는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를 지나 '퐁네프 다리'가 있는 '시테섬'으로 세느강을 따라 걸었다. 시테섬 주위로 사람들이 나와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숙소와 이어진 '퐁네프 다리(Pont Neuf)'는 퐁(pont)이 원래 '다리'란 뜻이니 '네프 다리'가 맞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아주 오래전에 보았지만, 영화나 소설 속 배경 장소에 왜들 직접 가보려 하는지 알게 된다. 간혹 실망할지라도 내가 그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낭만적인 느낌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 숙소 근처 적당한 곳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둘러보니 다행히 11시까지 운영하는 식당이 몇 곳 있었다. 비빔밥 사진이 걸려있는 아시안 식당에서 비교적 저렴한 일본 라멘이라도 먹으려고 들어갔다. 유럽은 어디나 한식은 비싸다. 이 식당의 재미있는 점은, 등에 한자로 '일본요리'라고 써진 티셔츠를 입은 중국인 주인장이 비빔밥을 팔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중일의 평화로운 조화를 몸소 실천하고 계신 아자씨 쵝오!!

숙소에 돌아와 대충 씻고 핸드폰 충전을 위해 전기 콘센트를 찾느라 진이 빠질 찰나 겨우 하나를 찾아 세팅하고선 잠자리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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