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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가는 길

브뤼셀 앤 파리

by 돌레인

2019. 6. 13


수없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바로 그날이 밝아왔다! 아침도 거른 채 염려 가득한 남편의 얼굴을 뒤로하고 브뤼셀 북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플릭스 버스'의 색이 워낙 튀어 정류장 찾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플릭스 버스의 도착과 출발 시각은 대체로 맞지 않아 미리부터 나가 기다려야 한대서 나도 30분 일찍 간 거였다. 정류장 주변은 전 인종들이 다 모인 듯 복닥복닥 했다.

명성 그대로 내가 타고 갈 버스는 30분이나 늦게 왔다. 버스 기사에게 표를 보여주고 예약된 자리로 올라가니 역시 염려한 대로 모녀로 보이는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일반 좌석은 선착순으로 아무 데나 앉지만, 내가 예약한 맨 앞자리의 파노라마석은 돈을 더 내야 지정석이 된다. 그래서 내가 미리 예약한 자리라니까 처음엔 무슨 소리냐고 도리어 짜증을 내는 거다. 기가 막혀 차근차근 설명을 하려는데 잘 먹히지 않자 옆 칸에 앉은 점잖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불어로 나를 변호해 주신 덕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 그분께 연신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앉자 내 옆으로 어떤 청년이 와서 털썩 앉았는데 아무래도 뒷좌석에 있다가 상황을 파악하곤 자리를 꿰찬 것 같았다. 암튼 외국에선 내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는 게 중요하단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느새 버스는 프랑스로 넘어갔다. 버스 안 화장실도 이용했는데 생각보다 깨끗했다. 3시간쯤 가서는 휴게소도 들렀는데, 옆 자리 청년이 내게 자기 짐을 맡기고선 담배를 피우러 내렸다. 화장실이 사람들로 붐볐는지 건너편 버스 옆에서 어떤 아저씨가 아무렇지 않게 들판을 보며 볼일을 봐서 순간 고개를 돌려버렸다.

4시간 여 동안 잠이 들다 깨다 스마트폰도 가끔 보며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다 보니 차가 파리 시내로 진입하려는지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베르시 공원' 한편 어두운 터널 속으로 버스가 들어가 승객들을 내려줬는데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곳이었다. 밖으로 나가니 너른 공원이었다.

스마트폰 지도를 보며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가 보니 지하철 역이 바로 나왔다. 지하철에선 소매치기를 특히 조심하라고 해서 마음을 엄청 졸이며 내려갔다. 현금이 결제되는 기계 앞에 줄을 서서 까르네 10장을 단번에 잘 샀다.

표를 끊고 내려가니 생각보다 깔끔해서 놀라고 또 안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르시는 신흥 도시인데다 이 14번 지하철도 1980년대에 만들어진 최첨단 무인 시스템 열차라고 한다.






내가 묵을 숙소와 가까운 '샤틀레(Châtelet)' 역에서 내렸다. 드디어 파리 중심부에 입성한 거다. 내가 파리에? 정말? 이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영락없는 갓 상경한 시골 아낙네 모습이었다.



도난 방지 줄을 연결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어렵지 않게 숙소를 찾아갔다. 숙박 절차를 밟고 열쇠를 받는데 스태프가 여긴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미안하다며 내게 짐을 어떻게 갖고 왔냐고 물어와 등에 달랑 맨 배낭을 보여주니 탁월하다고 치켜세워줬다.

내 방은 4층에 있었다. 33이라 적혀 있는 열쇠 번호를 따라 좁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헤매다 마침 청소 중인 흑인 아저씨께 물었더니 친절하게 도와주셨다(유럽은 1층이 0층이었던 거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냐 물어보셔서 '사우스 코리아!'라고 외쳤더니 '재패니스'인 줄 알았다셨다...>. < 그렇다고 BTS를 아시냐고 되물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2중문을 꼭 잠그고 방 안으로 들어서니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곳 숙소까지 무사히 찾아온 것만으로도 하나의 도전을 이룬 것처럼 내가 기특했다. 파리 시내 한복판의 숙소에 가만히 앉아 둘러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내가 만약 유학 온 고학생이라면, 내가 만약 벨 에포크 시대의 이름 모를 화가였다면... 그저 하룻밤 여행자인 게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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