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 앤 파리
이튿날 이른 아침, 암막 커튼을 살짝 열어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간단하게 차려입고 우리 부부는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우리 말고도 세 명의 투숙객들이 각자 자리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침 식단은 간이 뷔페였다.
이날의 첫 목적지는 '왕립 미술관'이었다. 금요일 평일 아침이라 일반 버스엔 등교하는 아이들과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런데 대부분 아이건 어른이건 우산은 들지 않고 맨몸이거나 후드 모자로 대충 둘러들 썼다. 워낙 날씨가 중년의 갱년기처럼 비가 오다가도 해가 쨍쨍 나선지 우산 챙기는 걸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다른 버스로 갈아타려고 내려서 둘러보니 '유럽 의회'앞이었다. 브뤼셀은 28개국(영국은 아직 발을 다 빼지 못했지만...>.<)이 가입되어 있는 '유럽 연합'의 실질적 수도여서 '유럽 연합 본부'가 있다.
버스를 타고 빙 돌아 왕립 미술관 앞에 내려 한국에서 미리 예매한 '브뤼셀 카드'를 등록하러 안내소를 찾아갔다.
광장 한가운데를 힘차게 달리고 있는 이 동상이 3차 십자군 전쟁에서 '살라딘'을 상대로 예루살렘을 지켰던 용맹스러운 기사 '발리안'이다. 한창 <비잔티움 연대기>에 빠져 있던 때 재미나게 본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을 브뤼셀 광장에서 마주하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안내소에서 카드를 등록했더니 별다른 종이표 없이 팸플릿과 지도를 무료로 줬다. 이것도 따로 구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
바로 옆 건물에 '악기 박물관'이 있어서 브뤼셀 카드 의 첫 개시를 했다. 안에선 촬영 금지라 그냥 눈으로 죽 훑어보는데, 한국의 악기 소개 코너에서 할 말을 잃었다. 실물 악기 하나 없이 한쪽 벽에 달랑 사진 몇 컷만 게시되어 있는 거다. 아시아 쪽은 중국으로 퉁친 듯 일본 악기도 두루뭉술하게 설명돼 있었다.
미술관 로비에 들어서자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이곳에선 3군데를 모두 볼 수 있는데 순서가 엉키고 만 거다. 어쨌든 어떤 화살표를 따라갔더니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래서 당도한 곳이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이었다.
단정한 양복과 중절모자 그리고 파이프 담배로 상징되는 르네 마그리트의 초상화를 베껴 그리다 보니 약간 젊어졌다... 그래도 '이 사람은 르네 마그리트가 아니다??'...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어 좋았다. 특히 낮과 밤이 공존하는 <빛의 제국> 시리즈는 홀린 듯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겨울비>를 못 봐서 아쉬웠다. It’s raining men Hallelujah~ 하려 했건만...
한 층 더 내려가 '세기말 미술관'으로 입장했다. 책으로만 봤던 앙소르의 <이상한 가면>, 윌리엄 모리스의 쏘울 메이트인 에드워드 번 존스의 <프시케의 결혼>, 페르낭 크노프의 <스핑크스> 그리고 알폰스 무하의 고혹적인 여인상을 본 것도 행운이었다.
체념한 듯 눈을 감고 주저앉은 모습의 어린 소녀 조각상은 그리고 싶을 만큼 선이 고왔다.
이제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긴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유럽 미술관은 어딜 가나 안락한 의자들이 있어 그 배려심에 감동하곤 한다.
어디선가 꼬릿한 냄새가 나서 자세히 봤더니 똥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현대 미술은 참으로 오묘하다...
오 마이 갓!! 피테르 브뤼헐의 <이카루스의 추락> 앞에 선 순간, 감사합니다! 를 속으로 외치고 말았다. 그 외 <반역 천사의 추락>이나 <베들레헴의 인구 조사> 등의 명작들을 세세히 들여다보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벽에 대고 쉬하고 있는 남자까지 챙겨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어용화가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이라니!!! 루브르에도 같은 그림이 있는데 브뤼셀의 그림이 원작이란다.
루벤스의 거대한 작품들과 현대 예술가 'Wim Delvoye'의 콜라보인 특별 전시도 열리고 있었다. 고개가 꺾일 정도의 대작들이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공장제로 작품들을 뽑아냈던 당시가 왠지 느껴졌다.
다리가 너무 아파 미술관 안 카페에 들어섰더니 맛있는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어마어마한 양의 감자튀김을 즉석에서 튀겨줬다. 수제 햄버거의 맛은 별다를 게 없지만, 시장이 반찬이라 주위 분위기까지 섞여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