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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당 Oct 03. 2021

시작, 끝, 매미

2020년. 10월 18일


  이미 가을 속으로 꽤나 걸어 들어왔다. 공들여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자 했던 9월 말의 시간들이 멀어지는 경적처럼 희미하다. 뒤늦게 복기해 보는 감흥은 부분 부분 박제가 되고 각색되어 그때의 온전한 마음이 아니다. 그래도 숨을 고르고 느낌을 더듬어 남은 진심을 건져본다.


  가장 사랑하는 계절은 여름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지어본 필명도 '여름비'였다. 봄비는 가녀리고 앳되고, 가을비는 성숙해서 울적하며, 겨울비는 쓸쓸하고 비장하지만, 여름비는 창창히 푸르른 젊음으로 언제나 신난 상태다. 그런 비를 품은 여름은 시작과 끝이 분명해서 좋았다.


  다른 계절은 무형이지만 여름은 질감과 부피가 느껴지는 유형의 계절이다. 여름을 이렇게 만드는 장본인은 매미다. 가장 사랑하는 곤충도 매미다.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자연물에 대한 이미지는 쉬 바뀌지 않는다. 나비는 낭창낭창 예쁘기만 하고, 잠자리는 가볍고 멋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있는 쉬운 면이 있었다. 귀뚜라미는 밤의 구석 어딘가에서 소리로만 존재하는 처량한 처지이고, 메뚜기는 곤충이라기보다 움직이는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매미는 그 분명함과 단단함, 우렁찬 소리가 경외로 느껴졌다. 온 산을 울리는 떼창은 그 자체가 매미라는 덩어리라, 눈길 닿는 곳에 있어도 함부로 잡을 수 없었다, 감히.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계절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훌륭한 신호수였고 그 계절의 외피를 만드는 재단사였다.


  다른 계절은 언제가 시작인가 애매모호하지만 여름은 다르다. 매미가 딱 울기 시작할 때 나의 여름은 시작이다. 공기 중의 습기가 나날이 사라지고 풀벌레가 온 산을 자잘하게 뒤덮고 있어도 그 공간을 가르고 나오는 매미소리가 있다면 여름은 아직 끝이 아니다. 매년 여름의 마지막에 매미와 함께 방점을 찍고 싶어 촉각을 곤두세우고 하루하루 접어가다가도, 아이들이 개학을 하고 번잡한 일들에 정신을 팔다 보면 언뜻 매미소리가 싹 사라진 서늘한 한낮을 느꼈다. 매년 여름 그렇게 실패를 했다. 올여름에는 꼭 인사를 해야지, 한 계절을 여미고 닫아서 시간의 저 너머로 데리고 가는 매미의 마지막 울음소리에, 수고했다고 따뜻한 인사를 얹어야지. 그래서 올여름에는 더 정신을 다잡았다.


  9월 마지막 주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줄어든 매미소리에 마음이 급해졌다. 숲을 채운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 속 어딘가에서 신호를 보내는 매미를 만나려고 앞산과 뒷산을 꼬불꼬불 돌아 두어 시간씩 걸어 다녔다. 9월 23일은 소리 찾기에 실패. 그렇다면 22일이 마지막이었나. 하루 더 확인을 해야지 하고 나섰던 9월 24일. 정랑고개 터널 위를 지나 장군정으로 뻗어 있는 오솔길을 지나던 찰나, 유달리 큰 은사시나무 높은 곳에서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터라 대책 없이 나무만 올려다볼 수는 없어서 길 따라 걷다 되돌아오기를 서너 번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나무 주변을 서성댔다. 혹시나 해서 그다음 날도 다다음날도 비슷한 코스를 돌았지만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9월 27일. 햇살이 아까워 나선 산책길에 밑동 굵은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다 들었다. 그 소리는 애절함일까 슬픔일까 비장함일까 이번에도 더 이상 울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소리는 다정함이었다 고쳐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야 이 여름이 마무리되었음을 알았다. 나의 여름은 9월 27일에 끝났다. 이제 분명한 마무리를 지었으니 또 다른 시작을 해 볼 다짐과 감사를 담아 나도 매앰매앰 화답을 했다.

  

  가을 속을 걸어 다니며 가끔 흙바닥을 꾹꾹 눌러본다. 내 인사를 전해 본다. 거기서도 안녕히 무사히 잘 지내고 있기를, 내년 어느 날 반갑게 와락 만나게 되기를...



<오래전부터 매미에 대한 인사를 전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글을 쓰고 나면 해소가 되는 게 맞는 걸까, 2021년 올해는 매미소리를 싹 잊고 지냈다. 그렇게 아껴 생각했던 마음을 쉽게 배신했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올해도 수고했던 매미들에게, 매앰매앰, 내년에 다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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