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벌써 두 번째 문자메시지다. 이번 주 내내 핸드폰에는 수시로 메시지가 뜬다. 배송 출발한다 곧 도착한다 배송이 완료되었다, 입고가 지연되고 있다 등등. 벼르고 벼르다 지난 주말 쇼핑의 봇물이 터진 둘째의 물품들이 온다는 전갈이다. 만 14세가 되지 않아 내 폰에 깔아놓은 앱으로 구매를 하니 관련 문자는 모두 나에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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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암호와 같은 옷은 무얼까.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옷으로 가늠되지는 않는다. "레이스 질색이야, 프릴 우웩, 블라우스는 불편해, 파인 옷은 못 입어, 컬러는 자고로 블랙 아니면 그레이지."
불과 몇 달 전의 내 딸들은 그랬다. 천지가 뒤바뀌었나 어느 날부터 첫째고 둘째고 프릴이 달리고, 소매는 봉긋 솟아, 손 들면 배꼽이 보일 수도 있을 길이의 알록달록한 것들을 수집 중이다.
크롭 리본 골지 니트 가디건
– 리본, 가당치도 않다. 초등입학 즈음부터 리본 달린 옷들은 거부했었던 아이들이다. 이 여름에 긴팔 니트가디건이라니. 종일 냉방 가동되는 곳에서만 지낼 참인가.
어깨 뽕 없는 싱글 크롭자켓
– 인턴 사원의 출근룩인가. 학원으로 출근할 참인가.
아가일 체크 패턴 조끼
– 조끼? 지금은 여름이다. 두 겹을 입는 용감무쌍한 패션개척자라니.
셔링 퍼프 반크롭 반팔니트
– 오글오글한 잔주름 그 셔링인가. 앤이 그토록 입고 싶어 하던 어깨 봉긋한 그 퍼프 말인가. 또 니트네, 건조기 돌렸다가는 영유아 싸이즈가 될 소재를 이 여름에 왜, 왜, 왜.
그 중에 최고는 이것이다.
“비너스 플라워 하객 랩 원피스”. 다섯 개의 단어 중 네 개가 웃긴다. 왜 비너스일까 여신풍이라는 뜻일까, 레트로가 유행이라지만 얘들이 꽃무늬를 두르고 걸치고 다닐 줄은 몰랐다. 랩도 이해가지 않는다. 원피스인데 랩이라면 천을 둘둘 말아서 입는 건가, 야한 건가. 결정타는 하객이다. 만 14세도 아닌 이 아이는 하객룩을 입고 어느 결혼식을 활보하겠다는 걸까.
이미 온 것도 있고 올 것도 있지만 애써 관심을 거두었다. 차마 보기가 힘들다. 이런 옷들이 배송되는 날의 풍경은 이러하다. 배송 포장지는 재활용표시도 없어 일반쓰레기로 버려야 하는데 이미 10리터 쓰레기봉투 하나를 채우고도 모자르다. 뜯어놓은 포장지는 방 여기저기 끈 떨어진 연처럼 내동댕이쳐져 있고, 새로 온 아이들이 기존 아이들과 어떻게 코디가 가능한지 가늠하느라 두 딸의 옷장은 쑥대밭이 된다.
안방 의자에 앉아서 그들을 본다. 큰 거울이 있는 화장실을 둘이서 들락날락거리는 모양을 본다. 나는 그것을 콩순이놀이라 부른다. 콩순이 옷입히기 놀이. 성장이 거의 끝난 첫째는 막상 입어보니 어깨가 넓어보이고 허벅지가 굵어보이고 다리가 짧아보인다고 옷 탓을 한다. 아직 2차 성징이 시작되지 않은 둘째의 마르고 얇은 몸에 대부분의 옷은 쏙쏙 잘 들어가니 첫째는 둘째의 몸매가 부럽다며 대리만족으로 이렇게 저렇게 입혀본다. 둘째는 또 언니의 과찬에 취한다.
차마 내 속의 말을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맨날 양팔 붙이고 웅크리고 핸드폰을 하니 승모근에 살이 붙지, 허벅지 역시 움직이지 않아서 굵어진 거 맞고, 160센티도 안 되는 키에 다리가 길어봤자 얼마나 길겠니, 그리고 니 동생은 몸매라 할 수도 없는 그냥 아직 자라지 않은 미성숙한 몸이야 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 집은 2대 1의 전장이 될 테니까. 사실을 말했지만 인신공격이라고 되받아칠 것이 분명하니 입은 닫는다. 부엌에서 안방 앞까지의 공간을 런웨이 삼아 둘이서 번갈아 입고 입혀서 왔다갔다 하는데 나는 이쁘다고 동조할 수는 없고 어이만 없다.
할아버지께 받은 용돈을 오래오래 갖고 있다 몇날 며칠 앱을 뒤지고 리뷰를 읽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며 구매한 노고야 알지. 그렇다면 입고 다녀야 할 거 아니냐. 저렇게 난리를 치고 코디를 하지만 결국 학원길 나설 때는 시커먼 티셔츠에 지난 가을부터 입고 다니는 도톰한 바지를 펄렁이며 나간다. 왜 안 입고 다니냐고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합창을 한다.
“이건 휴가 갈 때 입을 거예요.”
우리는 겨우 3박 4일의 여름휴가를 떠날예정이다. 그런데 두 딸이 장만하는 모양새를 보면 한 달의 크루즈 여행, 제주 한달살이라도 하러 갈 기세다. 3박 4일동안 시간마다 장소마다 갈아입을 요량이구나, 쇼핑몰 모델들처럼 사진찍기용으로 구매한 것이구나. 이 옷들을 입고는 시원한 실내에서 가만히 인형처럼 앉아있어야겠네, 마음껏 두 손을 들었다가 속옷이 보이겠네, 이 하얀 바지를 입고는 아무 데나 걸터앉을 수는 없겠네. 그렇게 파인 옷을 입고는 허리를 숙일 때마다 손으로 가슴 부분을 눌러야겠네.
엄마가 어떤 단점을 찾아내든 상관없다. 마네킹처럼 가만히 있으라 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10대들. 땀이 줄줄 눈으로 들어가도 따갑지 않다며 웃을 10대들.
이 모든 옷들은 에이블리에서 왔다. 시내버스 차체에 나붙은 에이블리 광고가 싫다. 그 예쁜 김태리가 지겹다. 내 마음은 애이불비다. ‘슬프지만 겉으로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슬프기는 하나 비참하지는 않은’이라는 뜻이다. 화가 나지만 겉으로 화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수십 만원짜리 티셔츠를 사달라거나 산 건 아니니 비참하지는 않다. 이 계절이 지나면 저 옷들 중 반 이상은 후회의 쓰레기통에 던져질 걸 안다. 선심 쓰듯이 엄마 입으실래요, 제안할 것도 안다. 작년부터 매 분기별 저런 종류의 옷을 저 사이트에서 사고 후회했으면서도 딸들은 배우지 못했다. 계절이 지나 옷장을 정리할 때 내년에도 입을 거야 물으면 "아니요, 잘못 샀어요, 뭐 이런 옷을 판대요," 볼멘소리로 쇼핑몰에 책임을 돌릴 것도 안다.
사계절 옷은 트렁크 하나에 싣고 떠날 만큼만 가지는 게 목표인, 옷에 관한 한 미니멀리스트인 엄마의 신념을 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한 벌에 2만원이 되지 않는 옷들에 어떤 큰 기대를 할 수 있겠나. 잠시 눈이 즐거워서 엔돌핀이 돌았다면 이 천조각들의 역할은 충분했을 수도 있다. 사사건건 의견이 맞지 않는 자매인데 이 분야만큼은 레고조각처럼 딱 들어맞고 상극인 자석마냥 찰싹 밀착되어 빈틈이 없다. 나는 어떤 논리나 합리적인 이유로도 그것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이건 타협의 문제가 아니니 내가 포기해야 맞다.
언젠가 이 시절이 그리울까, 이 소동이 아련해질까. 딸들이 이 집을 떠난 뒤 옷장 한 곳에 남은 아이들의 옷을 보며 살짝 눈물이 날까. 잠시 훗날의 어느 장면을 떠올리며 뻗쳐나가던 비난을 거두어 마음 한 곳에 묻어버린다. 나는 늙고 무거워지고 무채색이 되지만 딸들은 계속 피어나고 팔랑이고 천연색이다. 나비날개같은 보드랍고 반짝이는 저들의 안목과 즐거움을 그만 바스러뜨려야지. 나비 날개의 한철이 얼마나 예쁜가. 인생에서 저 한철은 얼마나 가볍고 사랑스러운가.
덧붙임 :
이 글을 완성할 즈음, “젤리 프릴 스퀘어넥 반팔 블라우스”가 도착했다. 반색을 하며 방으로 들어간 둘째는 입어보고는 질색팔색인 채로 나온다. 반딱반딱 번들번들한 하얀색의 그 옷은,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단체무용의상을 보는 기분이었다.
첫째는 언뜻 보면 괜찮다고 애써 위로를 하고, 둘째는 자신은 그렇게 언뜻 보지 않는다고 화풀이다. 진짜 별로라고 하면 너는 또 난리칠 거 아니야, 이쁘다고 해도 싫고, 그래도 코디를 잘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내가 입어봐도 될까? 언니가 입으면 입다가 터질 수도 있고 그러면 반품도 못한다고.
나는 솔직히 말했다, “생짜 나일론처럼 보이는구나, 인형옷 만드는 소재 알지? 그런 소재." 해당 옷을 검색해보던 둘째가 정신을 놓고 웃는다. "엄마 이 옷 소재가 나일론 더하기 레이온이에요. 역사책에서 보던 그 단어 나일론이 여기에 있어요. 사진으로는 실크처럼 보였다구요, 어떻게 이런 옷을 팔아요, 하하하, 저는 만 오천 원짜리 인형옷을 산 거네요." "그대로 살살 벗어라, 반송비 내고 몇 천원이라도 건지는 게 낫지."
소동이 끝나고 인형옷은 그대로 포장되어 신발장 위에 올려져있다. 둘은 오늘에서야 하나를 배웠다. 옷을 고를 때 소재를 살펴봐야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가르치지 않은 내 책임이다.
“엄마 폴리에스테르가 뭐예요, 레이온이 뭐예요, 아크릴은 뭐예요?”
아크릴? 여름에 아크릴 소재의 옷을 샀구나. 더 놀랄 일도 없다. 그래도 1년 넘게 돈을 쓰며 드디어 뭔가 하나를 배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