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머니의 팬티

1. 할머니의 팬티

by 파랑

나는 속옷 서랍장에서 팬티를 꺼낸다. 내 엉덩이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순면 팬티다. 자잘한 연보라색 꽃무늬 팬티로, 앞쪽에는 검정색 유성매직으로 ‘김덕자’라는 이름이 크게 씌어 있다. 김덕자는 할머니 이름이다. 팬티에 할머니 이름을 크게 또박또박 쓴 장본인은 바로 나다.

팬티에 두 발을 넣고 밴드를 허리로 끌어올린다. 할머니 팬티가 이렇게 편할 줄 몰랐다. 펑퍼짐한 팬티가 내 엉덩이를 낙낙하게 감싸주는데, 평화롭고 자유롭고 더군다나 아주 고요하다. 뭐라고 더 표현할까? 엉덩이가 무위자연으로 돌아간 느낌이라고나 할까?


남자친구 용태와 약속이 있다. 지하철 7호선 뚝섬한강공원역으로 나오란다. 오랜만에 만난다. 그동안 서로에게 일이 너무 많아서 데이트할 겨를도 없었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집을 나선다. 할머니 팬티를 입으니 든든하다. 당연하다. 할머니 팬티니까. 속옷 서랍장에는 할머니 팬티가 열아홉 장이나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