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상한 가죽가방

3. 이상한 가죽가방

by 파랑

누가 자신의 인생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까? 인생의 조감도는 불가능하다. 계획을 세워 알차게 노력하지만 과연 옳은 방향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편의점에서 김밥과 도시락을 진열하다가 떠오른 생각이었다. 지금은 내 인생의 유예기간인가. 정규 직장이 아닌 시간제 노동으로 꾸려가는 생활은 인생의 유예기간인가. 이런 불안이 문득문득 급습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갈 무렵, 뭔가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용태가 전화를 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야 하나……. 그 생각에 골몰하면서 용태를 만나러 나갔다. 배가 많이 고팠는데, 용태의 낯빛을 보자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들, 이것저것 죄다 재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닭가슴살이 들어 있는 스낵랩과 콜라를 샀다. 패스트푸드점이 소란스럽고 붐벼서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스낵랩을 각자 들고 먹으면서 종로1가 방향으로 걸었다. 저물녘 햇살이 섬세하게 내 몸에 감겼고 하늘에는 다채로운 색깔의 구름이 풍성하게 주름져 있었다. 세상이 참 비현실적으로 반짝이는 구나.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빨대로 콜라를 빨아들였다.

용태와 나는 광화문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즐겁게 수다 떨며 실실거리던 시기는 이제 끝난 걸까. 이제는 뭘 해도 그리 즐겁지 않았다. 용태는 언제부턴가 감기에 자주 걸렸고 빈 종이컵 같은 걸 거리에 내던졌고 시답잖은 것들에 불평을 쏟아냈고 늘 바쁘다고 짜증을 냈다. 피곤과 침울이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오늘은 가방까지 무거워보였다. 용태가 어깨에 메고 있는 검정색 가죽가방.

용태의 검정색 가죽가방에서는 여성용 티셔츠와 청반바지가 나왔다. 티셔츠와 반바지는 앙증맞게 귀여운 디자인에 특이한 그림이 있어서 내가 기뻐 날뛰며 받았다. 어디서 이런 걸 찾아서 사오는 걸까? 미니어처 건축물들이 나왔고 캐릭터 인형들이 나왔다. 유별난 디자인의 키홀더 ․ 팔찌 ․ 귀걸이 같은 소품들이 나왔다. 칼라볼펜 세트가 나왔고 색연필 세트가 나왔다. 두툼한 백지 노트가 나왔다. 출판된 지 삼십 년이 넘어 표지가 탈색되고 속지가 누렇게 변한 에드거 앨런 포의 시집 《애너벨 리》가 나왔고, 그 시집을 읽고 용태가 그린 화첩이 나왔다. - 그림솜씨는 사실 좀 놀라웠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 그런 것들을 나에게 불쑥 내밀면 그만이었다. 이를테면 선물이었다. 깜짝 선물은 나를 기쁘고 즐겁게 했다. 용태가 가방에서 꺼내면 뭐든 다 특이하고 특별했다. 어떨 땐 뻥튀기와 팝콘이 나왔고 만두와 김밥이 나왔다. 내 얼굴 만한 커다랗고 하얀 찐빵이 나왔을 땐 내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단팥앙금이 가득 차 있어서 용태와 내가 한참을 번갈아 베어 먹었다.

보스턴백 스타일의 그다지 크지 않은 그 가방은 용태에게 잘 어울렸다. 가방에서 어떨 땐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고, 어떨 땐 뭔가가 잔뜩 들어갔다. 내 가방이 무거울 때면 용태가 받아서 그 가방에 쏘옥 넣어버렸다. 그러면 보기 싫게 배가 불룩 튀어나오는 게 아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양으로 용태의 어깨에 걸쳐졌다. 용태는 가방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다.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무거워? 내가 가방지퍼를 열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용태가 가방을 뺏으며 화를 벌컥 냈다. 나는 입을 삐죽거리거나 눈을 째리거나 하지 않았다. 가방 속을 보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나를 위해 사다주는 물건들을 생각하면 가방 속이 영 예상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콜라의 빨대를 빨면서 용태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니 가방은 마술사 가방 같애. 옷도 나오고 그림도 나오고 식량도 나오고……. 오늘은 뭐 안 나와?”

“마술사가 아니라 마법사야. 마법의 나라를 들락거리는 가방. 오늘에야 니가 내 정체를 눈치 챘구나. 니가 질색하는 닭발이 지금 바로 나올 수도 있어. 사람 머리통, 사람 발가락, 사람 눈알, 그런 것도 언제 나올 거야. 기대해.”

나는 큭 웃었다.

용태가 몇 걸음 내딛더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인생이 생각보다 기네.”

발걸음을 늦추며 무거운 한숨을 한 번 더 쏟아냈다. 나는 맞장구를 쳐주지 못했다. 대꾸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내 턱 괜찮니?”

용태가 걸음을 멈추고 턱을 불쑥 내밀었다.

나는 용태의 턱을 바라보며 뭐가, 라고 되물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성의 있게 살펴봐라.”

왜 이러지?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용태가 오른손을 가져다가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닫았다.

둘이 걷다보니 화단과 벤치가 눈앞에 보였다. 높은 빌딩 때문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았다.

“사실 요즘,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는데…….”

용태는 격앙된 어조로 말을 시작하다가 기운 없이 말끝을 흐렸다. 또 턱을 매만졌다.

“푸른 수염이 자라고 있어. 너무 빨리 자라. 아침에 면도하고 나오면 점심쯤 되면 벌써 수염이 돋기 시작하는데……, 푸른 수염이 너무 빨리, 너무 무성하게 자라는 거야.”

나는 웃음을 하하, 터트렸다.

“회춘하는 거지. 한창 때인 거야.”

“야, 웃을 일이 아니야. 너까지 이러면……, 정말 말하기 싫다.”

용태가 벌컥 화를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너무 심각해. 귀가할 때쯤이면 푸른 수염이 손가락 한마디정도까지 길어져 있어. 밤에 샤워하면서 면도하기 귀찮아서 그냥 자면 다음날은 손가락 길이만큼 자라나 있어. 그런데 수염 자라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그제보다 오늘이 훨씬 더 빨리 자라더라구. 색깔도 푸른색이니까……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용태의 턱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입술 위와 턱 주변이 짙푸르게 변해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수염을 깎지 않은 보통 남자의 턱처럼 보이기도 했다.

“좀 전에 만났을 때는 얼굴이 아무렇지도 않았어. 아침에 면도 안했나보다, 그 정도.”

“요즘 낮에 면도 한 번씩 더해. 일 보다가 근처 빌딩 화장실에 들어가서 다시 면도하는 거야.”

시선을 돌리려다 다시 용태의 턱을 바라보았다.

“이래가지고 무슨 영업을 하겠어. 난 망했어. 끝장났어. 나는 왜 이렇게 불운하지?”

용태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러댔다.

“다 끝났어. 다 망했어.”

나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푸른 수염」이라는 동화만 떠오를 뿐이었다. 푸른 수염이 한 뼘이나 두 뼘 정도 덥수룩하게 자라난 용태의 얼굴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본 늙은 귀족만이 떠올랐다. 구불텅구불텅한 푸른 수염이 바람에 휘날리던 그림.

잠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라고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용태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당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차도에는 자동차들이 움직이다 멈추고 다시 움직이다 멈추며 둔중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 앞을 빠른 걸음으로 스쳐 사라졌다. 시간의 미궁 같은……, 둔한 흐름이나 빠른 흐름이나 동일한 일 분, 오 분, 십 분을 통과하고 있었다. 서두를 필요도 늦장을 부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정글 같은 무엇을 헤치고 나가는 수밖에. 무엇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불안인지 푸른 수염인지 시간인지…….


용태의 어깨는 며칠 사이에 구부정해졌다. 지하철 광화문역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헤어질 때 마음이 아려왔다.


집으로 가는 길. 지하철 수유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갖가지 구두소리가 요란했다. 내 앞에서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가방이 조금 꿈틀댔다. 옆의 여자 백팩은 조금 부풀어올랐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방을 지니고 다녔다. 용태의 가방이 생각났다. 용태의 허리춤에서 꿈틀대던 검정색 가죽가방. 자신의 가방에서 사람의 머리통 따위가 나올지 모른다고 했지. 나는 약간 웃었지. 용태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보지 못하게 했었지.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을까. 나에게 무엇을 숨기고 싶은 걸까. 이 많은 사람들은 가방 속에 무엇을 숨기고 다닐까.

지하철 출구의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는데,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졌다. 용태의 가방 속에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는 게 맞다. 번잡한 고민으로 무거워진 용태의 머리가 들어 있다. 갈등하는 머리, 뒤숭숭한 머리, 졸린 머리, 열이 나는 머리, 터질 듯 혼잡한 머리. 시시때때로 불안에 흔들리는 용태의 눈알들이 가방 가득 들어 있다. 세상의 소음이 고통스러워 이어폰을 꽂은 용태의 귀도 가득 들어 있다. 용태의 손가락들은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여 있다. 어쩔 줄 몰라 마주 비비고 깍지 끼고 주먹 쥐던 용태의 손가락들과 땀에 흥건히 젖은 손가락들과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며 긴장하던 용태의 손가락들. 용태의 발가락들도 가방 속에 산더미를 이루며 쌓여 있다. 탁자 밑에서 수시로 덜덜 떠는 다리를 지탱해주던 발가락들과 구두 속에서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던 발가락들…….

용태의 검정색 가방이 무거운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아챘다. 엄청나게 커다란 가방을, 커다란 가방인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어깨에 맵시 있게 메고 다니는, 용태의 번민을 지금에야 알아챘다.

용태는 집으로 잘 가고 있겠지. 어깨에 둘러멘 검정색 가죽가방이 그의 허리부근에서 덜렁거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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