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원문)
La mort libérée du mourir.
J'ai alors ce fantasme :
une hémorragie douce
qui ne coulerait d'aucan point de mon corps,
une consomption presque immédiate,
calculée pour que j'aie le temps de désouffrir
sans avoir encore disparu.
(나의 번역)
'죽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죽음.
그런 것에 대한 환상을 품어 본다 :
내 몸 어디에서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출혈,
나 자신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때에도
고통에서 벗어날 시간을 갖도록 잘 계산된,
거의 즉각적인 소멸
(기억하고 싶은 단어)
* hémorragie : 1.(의학) 출혈 2. (경제적) 손실
hémo- '피'를 뜻하는 접두어,
ex) hémocompatible 혈액형이 같은
* désouffrir : 사전에 없는 롤랑 바르트의 조어
dé(분리, 해체를 뜻하는 접두어) + souffrir (고통을 겪다)
(10줄 단상 fragments)
'사랑'에 관한 단상 맨 앞에 놓인 것은, '소멸' 혹은 '죽음'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 책에서 그 어떤 인과성이나 통합성을 없애고 싶다고, 그런 것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그저 가나다순으로 배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연하게도 이 책의 맨 처음에 놓이고 만, '소멸'과 '죽음'이 내게는 꽤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는가?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극도의 행복 속에서도 인간은 은연중 죽음을 떠올릴 수 있다. 그 순간 내가 죽지 않는다면, 그 행복이 먼저 죽게 될 것이므로. 그때의 죽음은 영원한 행복에 대한 욕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르트는 'La mort libérée de la mort'라 쓰지 않고 'La mort libérée du mourir'라 썼다. mort(죽음)는 명사지만 mourir(죽다)는 동사다. 그러므로 그가 환상하는 죽음이란, 죽어가는 행위 중의 구차하고 비루한 과정이 없는, 결과만 있는 그야말로 달콤한 죽음이고, 그야말로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죽음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금기다. 인간이라면 무릇, 그 어떤 운명에 놓여있든 간에, 자기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왜? 대체 언제부터 사람들은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 바타유의 추론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효율을 따져가며 ‘노동'하게 된 이후다. 그때부터 인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비효율적인 죽음으로의 추락을 극복하며 굳건하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을 떠올릴 만큼 황홀한) 사랑에도 도취할 수 없게 된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생을 위한' 사랑은, 어쩌면 단지 '잘 노동하기 위한' 사랑일 뿐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