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하루 네 쪽 읽기, p.337~340
낯선 자를 "타자"로 포착하는 것은 오히려 원시적 사회에서다... 인종주의는 타자라는 소립자를 결코 탐지하지 않으며, 자신을 동일화되게 내버려 두지 않는 (또는 이러저러한 격차에 의한 동일화만을 허락하는) 그 자가 제거될 때까지 동일자의 파동을 전파한다. 인종주의의 잔인성은 그것 자체의 무능력 혹은 단순성에만 비길 수 있다.
Ce serait plutôt dans les sociétés primitives qu'on saisit l'étranger comme un «autre»... Le racisme ne détecte jamais les particules de l'autre, il propage les ondes du même jusqu'a l'extinction de ce qui ne se laisse pas identifier (ou qui ne se laisse identifier qu'à partir de tel ou tel écart ). Sa cruauté n'a d'égale que son incompétence ou sa naïveté.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는 엉뚱한 상황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이상한 '병'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거나, 자기를 비웃는 것으로 알고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요컨대, 웃길 때 웃을 줄 아는 게 정상인이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서로의 삶이 다른데, 유머코드는 왜 같아야 하는가?
오랫동안 인문학 공동체를 다니며 재밌게 공부생활을 했다. 그곳에서는 매년 '축제'라는 이름으로 한 해 동안 해 온 공부를 정리하고 공동체에 들락거리지 않던 외부인(?)들도 초대해서 발표도 했다. 그런데 한 번은 발표가 끝나고 나서, 사회자가 우리로서는 낯선 이에게 소감 한마디를 부탁했더니 그분이 이런 말을 했다.
"다들 같은 타이밍에 같이 웃으시는데, 거기에 맞추기 어렵네요."
사람들은 그저 웃어넘겼는데, 나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곳에서의 오랜 공부-생활을 끝내기로 했다.) 가끔 되돌아보면 그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고 몰랐던 것을 새로 배운 것도 참 많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도 실상 많았다. (물론 당시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 모든 것들에 누구보다 더 열광했었다.)
과연, 지금의 나는 또 무엇에 열광하고 동일화되고, 그러면서 뭔가를 배우고, 있을 것인가?